2025. 4. 06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4-06본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12:1-3. 4/6
사랑하는 여러분, 다음 주면 교회는 고난주간을 맞게 됩니다. 20세기의 탁월한 신학자였던 존 스타트 목사님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처녀 몸을 통해 잉태했다는 동정녀 탄생 이야기일까? 아니다. 그러면 무엇일까? 성경에 많이 기록되진 않았지만 예수님의 젊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들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말씀인 교훈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헌신적으로 종의 삶을 보여주신 봉사활동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부활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부활도 아니다. 그러면 뭘까?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셔서 영원토록 다스린다는 통치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존 스타트의 대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죽음이 기독교의 중심이요, 계시의 중심이다."라고 그는 선언했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중심도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모든 중심에 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모든 것이 그분의 십자가 속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의 도를 깨닫기 전에 예수님을 안다는 소리를 하면 안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닫고 깊이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은혜받게 되면, 그 사람이야말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요,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죽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진수요, 본질이요, 기본입니다.
Ⅰ. 예수를 바라보자 (2절)
오늘 본문 2절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외칩니다. 여기 바라보자는 이 말의 뜻은 단순히 "보다"가 아니라, "주변의 다른 것을 보지 말고, 오직 한 분, 예수께만 시선을 고정하라."는 아주 강한 집중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뉴스를 틀면 하루에도 몇 번씩 상황이 뒤바뀌는 혼란의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탄핵 정국은 국민들 사이에 분열을 만들고, 교회 안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누구를 지지하느냐,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에 따라 서로를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다른 것을 다 거두고, 예수만 바라보라." 이 말은, 우리의 시선을 세상에 고정하지 말고 예수님께 고정하라는 강력한 권면입니다.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시선의 방향이 신앙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도 따라가고, 우리의 감정도 따라가고, 우리의 행동과 선택도 영향을 받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분노가 솟구치고,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하게 되며, 미래를 바라보면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소망이 피어나고, 마음이 평안해지고, 신앙이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바라보자’는 이 말씀은 단지 고개를 들어 보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TV나 SNS에 휘둘리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바라보아야 합니까? 2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서 “온 하시는 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십시오.
‘온전하게 하다’는 이 단어는 ‘목표에 도달하게 하다’, ‘마침내 목적을 성취하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를 돕는 분이 아니라,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시고, 그 여정을 완전히 끝까지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순종으로 온전함을 이루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2절 하반절을 보십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참으신 것은 그 앞에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구원의 기쁨이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승리와 영광의 기쁨입니다. 따라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망으로 십자가를 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망으로 십자가를 참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앞에 구원의 기쁨, 승리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지혜임을 체험하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증인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십자가의 형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뼈는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촛밀 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내 힘은 질그릇 같이 말랐습니다. 내 혀는 이틀에 붙었습니다.'(시22:14)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히신 주님의 그 부끄러운 모습을 놓고 시편 22편에 보면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왜 이렇게 말 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바로 이리 같은 존재, 죄로 범벅이 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고통을 친히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도 여전히 세상적이고 변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별로 모릅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다 영적으로 심한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저는 이 고난주간은 바울의 고백처럼 갈5: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느리라’는 이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Ⅱ. 예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1절
1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을 믿음의 경주로 비유한다면, 달리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뭘까요? 몸을 가볍게 하는 겁니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무거운 짐을 들고 달릴 수는 없잖아요.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경주를 앞두고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모든 무거운 것’이고, 둘째는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해물은 무엇입니까?
여기 무거운 짐은 과도하게 무거운 것이나 거대한 짐을 말합니다. 운동선수는 가능한 한 무게를 줄이기 위해 러닝화와 팬티까지도 가볍게 만듭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과 사귀고, 하나님 음성을 듣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찬양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우리 육신은 즐거워할지도 모르지만- 즉, 믿음 생활하는 데에 무거운 짐이 되어 이로 인해 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또 ‘얽매이기 쉬운 죄’가 뭘까요? 여기서 “얽매이다”라는 이 단어는 ‘쉽게 감겨서 방해하고 빠져나가기 어려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치 거미줄처럼 우리 주위를 칭칭 감고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죄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우리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발목을 붙잡고 흔들어버리는 죄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죄의 사슬에 메이게 되면 천천히 우리를 묶고,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걸 막아버립니다. 죄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없다면 죄 지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우리를 얽어맵니다. 자유 없는 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번 걸리면 우리를 절대 놓지 않습니다. 끊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양이 잘 뒤집힌다고 합니다. 양이 뒤집어 지면 사지가 하늘로 향하면서 짧게는 네 시간 많게는 하루도 채 안되어 질식사 한다고 합니다. 선한 목자에게 뒤집힌 양을 바로 세워주는 일은 굉장히 필요합니다. 양이 왜 잘 넘어지는가를 조사해봤더니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양이 약간 웅덩이가 파진 쪽에 기대다가 벌렁 넘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양이 어떨 때 뒤집어지는가 하고 보니 양의 털에 배설물이 너무 많이 붙어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목자가 와서 양의 털을 깎아주면 그제야 가볍게 자기 갈 길을 걸어간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벗어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버리고’라는 말은 원래는 ‘옷을 벗어버리다’는 뜻입니다. 마치 땀에 젖은 옷을 훌훌 벗어 던지듯, 죄를 단호하게 끊어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얽매고 있는 죄는 무엇인가요? 그 죄를 품은 채로는 주님이 준비하신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릴 수 없습니다. 오늘, 그 죄를 버립시다. 거미줄처럼 칭칭 감긴 그 죄를, 주님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훌훌 벗어 던집시다. 그래야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달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럴리는 없지만, 혹시 아직도 죄 문제로 신앙 생활에 기쁨을 잃어버렸습니까?
무거운 죄의 짐은 어떻게 할까요? 죄의 짐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회개는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죄에 얽매여서 더 이상 경주할 수 없게 된 사람들에게 다시금 경주할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요일1: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다시 믿음의 끈을 동여 메고 이 고난 주간에 준비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주간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할 일은
Ⅲ.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3절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은 그냥 한번 떠올리는 수준이 아닙니다. ‘깊이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쓰러질 것 같을 때, 그럴수록 예수님을 자세히, 깊이 생각해 보십시요. 주님이 어떤 길을 걸으셨는지, 그리고 그 길을 왜 걸으셨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생각이 여러분을 일으켜 세울 겁니다. 그 생각이 낙심을 이기게 할 겁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우리를 다시금 주님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고난주간에 하나님의 아들, 죄 없는 분이 양발, 양손에 못이 박혀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그 갈보리 언덕으로 한 번 올라가 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그분의 얼굴을 우러러 보십시오. 여러분이 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인지 해답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왜 죄인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 믿지만 죄책감에 끌려 다니며 신음하는 분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향해 달려 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가서 예수님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죄도 용서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 앞에는 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죄의 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랑의 갈증을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까? 얼마든지 우리는 사랑의 갈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는 사랑으로는 우리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저 갈보리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십시오. 거기에 가면 큰 사랑이 있습니다. 큰 사랑이 있습니다.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그 사랑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읍시다. 그 사랑의 강물에 우리를 던집시다. 그 사랑 안에 영원한 기쁨과 만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예배자로 모인 우리는 정말 깨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오늘의 현실 앞에 무력하리 만치 무너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이와 같은 인생의 한 복판에 다가오신 예수님은 사42:3절을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아시고 탄식도 아십니다. 우리의 후회도 아시고 허물도 아십니다. 아들을 죽여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면서까지 죄인 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난 주간 하루 10분만이라도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10분만이라도 묵상하십시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 앞으로 다가 가세요. 세상사는 것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주님은 우리에게 자존심을 심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그 은혜로 우리도 일어 설 것입니다. 내게 맡긴 잔도 넉넉히 감당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이 갈망이 고난주간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다음 주면 교회는 고난주간을 맞게 됩니다. 20세기의 탁월한 신학자였던 존 스타트 목사님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처녀 몸을 통해 잉태했다는 동정녀 탄생 이야기일까? 아니다. 그러면 무엇일까? 성경에 많이 기록되진 않았지만 예수님의 젊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들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말씀인 교훈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헌신적으로 종의 삶을 보여주신 봉사활동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부활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부활도 아니다. 그러면 뭘까?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셔서 영원토록 다스린다는 통치일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존 스타트의 대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죽음이 기독교의 중심이요, 계시의 중심이다."라고 그는 선언했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중심도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모든 중심에 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모든 것이 그분의 십자가 속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의 도를 깨닫기 전에 예수님을 안다는 소리를 하면 안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닫고 깊이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은혜받게 되면, 그 사람이야말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요,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죽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진수요, 본질이요, 기본입니다.
Ⅰ. 예수를 바라보자 (2절)
오늘 본문 2절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외칩니다. 여기 바라보자는 이 말의 뜻은 단순히 "보다"가 아니라, "주변의 다른 것을 보지 말고, 오직 한 분, 예수께만 시선을 고정하라."는 아주 강한 집중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뉴스를 틀면 하루에도 몇 번씩 상황이 뒤바뀌는 혼란의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탄핵 정국은 국민들 사이에 분열을 만들고, 교회 안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누구를 지지하느냐,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에 따라 서로를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다른 것을 다 거두고, 예수만 바라보라." 이 말은, 우리의 시선을 세상에 고정하지 말고 예수님께 고정하라는 강력한 권면입니다.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시선의 방향이 신앙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도 따라가고, 우리의 감정도 따라가고, 우리의 행동과 선택도 영향을 받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분노가 솟구치고,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하게 되며, 미래를 바라보면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소망이 피어나고, 마음이 평안해지고, 신앙이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바라보자’는 이 말씀은 단지 고개를 들어 보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TV나 SNS에 휘둘리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바라보아야 합니까? 2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서 “온 하시는 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십시오.
‘온전하게 하다’는 이 단어는 ‘목표에 도달하게 하다’, ‘마침내 목적을 성취하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를 돕는 분이 아니라,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시고, 그 여정을 완전히 끝까지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순종으로 온전함을 이루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2절 하반절을 보십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참으신 것은 그 앞에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구원의 기쁨이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승리와 영광의 기쁨입니다. 따라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망으로 십자가를 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망으로 십자가를 참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앞에 구원의 기쁨, 승리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지혜임을 체험하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증인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십자가의 형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뼈는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촛밀 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내 힘은 질그릇 같이 말랐습니다. 내 혀는 이틀에 붙었습니다.'(시22:14)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히신 주님의 그 부끄러운 모습을 놓고 시편 22편에 보면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왜 이렇게 말 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바로 이리 같은 존재, 죄로 범벅이 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고통을 친히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도 여전히 세상적이고 변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별로 모릅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다 영적으로 심한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저는 이 고난주간은 바울의 고백처럼 갈5: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느리라’는 이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Ⅱ. 예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1절
1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을 믿음의 경주로 비유한다면, 달리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뭘까요? 몸을 가볍게 하는 겁니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무거운 짐을 들고 달릴 수는 없잖아요.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경주를 앞두고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모든 무거운 것’이고, 둘째는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해물은 무엇입니까?
여기 무거운 짐은 과도하게 무거운 것이나 거대한 짐을 말합니다. 운동선수는 가능한 한 무게를 줄이기 위해 러닝화와 팬티까지도 가볍게 만듭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과 사귀고, 하나님 음성을 듣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찬양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우리 육신은 즐거워할지도 모르지만- 즉, 믿음 생활하는 데에 무거운 짐이 되어 이로 인해 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또 ‘얽매이기 쉬운 죄’가 뭘까요? 여기서 “얽매이다”라는 이 단어는 ‘쉽게 감겨서 방해하고 빠져나가기 어려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치 거미줄처럼 우리 주위를 칭칭 감고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죄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우리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발목을 붙잡고 흔들어버리는 죄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죄의 사슬에 메이게 되면 천천히 우리를 묶고,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걸 막아버립니다. 죄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없다면 죄 지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우리를 얽어맵니다. 자유 없는 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번 걸리면 우리를 절대 놓지 않습니다. 끊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양이 잘 뒤집힌다고 합니다. 양이 뒤집어 지면 사지가 하늘로 향하면서 짧게는 네 시간 많게는 하루도 채 안되어 질식사 한다고 합니다. 선한 목자에게 뒤집힌 양을 바로 세워주는 일은 굉장히 필요합니다. 양이 왜 잘 넘어지는가를 조사해봤더니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양이 약간 웅덩이가 파진 쪽에 기대다가 벌렁 넘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양이 어떨 때 뒤집어지는가 하고 보니 양의 털에 배설물이 너무 많이 붙어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목자가 와서 양의 털을 깎아주면 그제야 가볍게 자기 갈 길을 걸어간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벗어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버리고’라는 말은 원래는 ‘옷을 벗어버리다’는 뜻입니다. 마치 땀에 젖은 옷을 훌훌 벗어 던지듯, 죄를 단호하게 끊어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얽매고 있는 죄는 무엇인가요? 그 죄를 품은 채로는 주님이 준비하신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릴 수 없습니다. 오늘, 그 죄를 버립시다. 거미줄처럼 칭칭 감긴 그 죄를, 주님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훌훌 벗어 던집시다. 그래야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달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럴리는 없지만, 혹시 아직도 죄 문제로 신앙 생활에 기쁨을 잃어버렸습니까?
무거운 죄의 짐은 어떻게 할까요? 죄의 짐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회개는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죄에 얽매여서 더 이상 경주할 수 없게 된 사람들에게 다시금 경주할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요일1: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다시 믿음의 끈을 동여 메고 이 고난 주간에 준비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주간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할 일은
Ⅲ.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3절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은 그냥 한번 떠올리는 수준이 아닙니다. ‘깊이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쓰러질 것 같을 때, 그럴수록 예수님을 자세히, 깊이 생각해 보십시요. 주님이 어떤 길을 걸으셨는지, 그리고 그 길을 왜 걸으셨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생각이 여러분을 일으켜 세울 겁니다. 그 생각이 낙심을 이기게 할 겁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우리를 다시금 주님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고난주간에 하나님의 아들, 죄 없는 분이 양발, 양손에 못이 박혀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그 갈보리 언덕으로 한 번 올라가 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그분의 얼굴을 우러러 보십시오. 여러분이 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인지 해답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왜 죄인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 믿지만 죄책감에 끌려 다니며 신음하는 분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향해 달려 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가서 예수님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죄도 용서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 앞에는 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죄의 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랑의 갈증을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까? 얼마든지 우리는 사랑의 갈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는 사랑으로는 우리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저 갈보리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십시오. 거기에 가면 큰 사랑이 있습니다. 큰 사랑이 있습니다.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그 사랑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읍시다. 그 사랑의 강물에 우리를 던집시다. 그 사랑 안에 영원한 기쁨과 만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예배자로 모인 우리는 정말 깨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오늘의 현실 앞에 무력하리 만치 무너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이와 같은 인생의 한 복판에 다가오신 예수님은 사42:3절을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아시고 탄식도 아십니다. 우리의 후회도 아시고 허물도 아십니다. 아들을 죽여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면서까지 죄인 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난 주간 하루 10분만이라도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10분만이라도 묵상하십시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 앞으로 다가 가세요. 세상사는 것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주님은 우리에게 자존심을 심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그 은혜로 우리도 일어 설 것입니다. 내게 맡긴 잔도 넉넉히 감당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이 갈망이 고난주간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