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왜 찔리고 상하셨는가? 사53:4-6
페이지 정보
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4-13본문
보라 왜 찔리고 상하셨는가? 사 53:4-6. 2025. 4/13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은 ‘죽음’이라는 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죽음이 진정 가치 있는 죽음일까요? 그냥 숨을 거두는 것이 전부일까요? 아니면, 무언가를 남기고, 무언가를 위해 죽는 것이 의미 있는 죽음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단순한 끝이 아니라, 생명의 시작으로 보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처럼 주님의 죽음을 통해 많은 생명이 살아나고, 우리도 그 생명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고난주간, 우리가 함께 바라봐야 할 것은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고통스럽고 처절했지만, 가장 거룩하고 가장 의미 있었던 죽음. 그 죽음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았고, 그 사랑 안에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그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함께 묵상하며, 우리 인생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또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생각 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이사야는 특히 40-66장을 구약 속의 신약이라 부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자로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게 될 사건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그중의 한 장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겪으실 고난과 승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온갖 멸시와 천대, 굴욕과 고통을 다 겪으셨고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한 생을 바쳐 사역의 자리에 섰던 이사야는 누구입니까? 이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사야는 남왕국 유다가 역사적으로 위태로운 때 선지자로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이때 그가 전한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여호와께서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는 그 이름의 뜻대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며 선지자의 사역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Ⅰ. 그가 받은 소명
사 6장을 보면 이사야는 자신이 소명 받을 때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1절을 보면 “웃시아 왕의 죽던 해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부르심을 받은 때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웃시아 왕은 남왕국 유다 왕 중에서 나라를 크게 부흥시킨 손꼽히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만해 져서 성전에 들어가 향을 피우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로 문둥병이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국가적인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외적으로는 부유했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히 병들어 있었습니다. 형식적인 종교생활, 공의가 무너진 사회, 우상숭배가 만연하던 시대였습니다. 청년 이사야는 조국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 때 어느 날 성전에서 기도할 때 환상을 보게 됩니다. 성전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그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신은 너무 초라한 죄인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한 스랍이 제단의 핀 숯을 입술에 대주면서 죄가 사해졌다는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난 뒤의 하나님의 소명을 받습니다.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듣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답을 했습니다. 이사야는 이 소명사건 이후에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이사야는 왕들과 가까운 친척으로 왕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권력을 추구하고 세상적 성공을 꿈꾸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명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자신의 꿈을 좇는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폴 손이라는 분이 쓴 [청년의 시간](Quater Life Calling)이란 책을 보면 자신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된 이야기를 써놓았습니다. 이분은 20대 중반에 세계최대항공사인 보잉사에 입사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고 자신도 매우 기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회사생활이 힘이 듭니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 회의가 듭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나는 왜 살고 있나?”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들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마음이 힘이 들까요?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그런데 기도 중에 그런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폴! 네 질문이 잘못되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묻기 보다는 자신이 바라는 일들을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어.” 이때부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즉 소명을 생각하게 됐고, 그러면서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힘이 드는 이유는 많은 경우 우리 인생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원, 자신의 기대에 인생의 방향을 맞추고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기대에 인생의 방향을 맞추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 살기가 힘들다고 여겨질 때는 한 번 우리 인생의 방향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내 인생의 방향이 잘못되어있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많은 것이 달라야 하는데,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인생의 방향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자기가 바라고 기대하는 목표를 향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소명을 향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Ⅱ. 그가 붙들고 나갈 소명은 무엇입니까?
이사야가 소명을 받은 때 그의 나이가 20세 쯤 되었습니다. 이때가 주전 739년입니다. 그리고 그가 순교한 때는 므낫세 왕 때로 주전 680년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는 선지자로 소명을 받은 후에 59년을 선지자로서 소명을 감당했습니다. 왕이 네 번 바뀌고, 공격해 오는 적들이 바뀌고, 시대상황이 아무리 바뀌어도 일관된 믿음으로 일관된 메시지를 정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자칫 변화의 흐름 속에 우리의 믿음도 흔들리고 변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이사야처럼 초지일관의 믿음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그가 가졌던 사명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의 삶을 버팀목처럼 지켜주었고 한 생을 그 말씀을 따라 살았던 복음- 4-6절입니다. 다 같이 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Ⅲ. 메시야의 모습: 고난받는 왕
이사야는 53장에서 메시야가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상세히 전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여러분, 이사야가 본 메시야는 로마 군대 앞에서 칼을 들고 나타나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상처입고, 묵묵히 침묵하며 끌려가는 어린 양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여러분, 예수님은 이유 없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게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 놀라운 비밀을 수백 년 전에 보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보라! 그분을 주목하라! 너희를 대신할 메시야다!”
52:13절에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우선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 말은 그냥 “한번 봐라”가 아닙니다. “눈을 들어 제대로 봐라. 너희가 지금 놓치고 있는 진짜 희망을 바라봐라.”는 외침입니다. 무엇을 보라는 걸까요? 바로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받는 종으로 오시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지만,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형통케 할 것이다.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자그만치 보라는 단어가 이사야에 70회나 나옵니다. 이사야는 평생을 이 복음을 가지고 60 여년 동안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를 외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사야 53장은 오늘 고난주간을 보내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십자가를 바라보라, 예수님을 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뉴스, 정치, 전쟁, 고통 속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 종을 보라! 그가 너를 위해 고난받았노라!” 예수님의 고난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심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난주간에 다시 결단해야 합니다. 이 고난의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믿고 따르겠다고. 이사야처럼 외면당해도, 환영받지 못해도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골고다 언덕에 올라왔습니다. 한평생 맹인으로 살았지만, 영감이 넘치는 찬송가를 많이 남겨서 지금도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감동시키는 찬송 작가 패니 크로스비가 쓴 496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소서/ 거기에 값없이 주시는 보배로운 샘/ 갈보리 샘으로부터 흐르는 치유의 시내가 있나이다/ 십자가에 가까이 의지하고 서서 거기서 천국 가도록 항상 머물겠네.' 항상 십자가 곁에 머물기를 사모하는 작가의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찌 작가 혼자의 마음이 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찬송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다시 한번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오늘 우리 중에 왜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왜 죄인이라고 하는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아서 잘 깨닫지 못하는 분이 행여나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십자가의 길을 이 고난주간 한 번 따라가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죄 없는 분이 양발, 양손에 못이 박혀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그 갈보리 언덕으로 한 번 올라가 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그분의 얼굴을 우러러 보십시오. 당신이 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인지 해답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이 왜 죄인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 믿지만 죄책감에 끌려 다니며 신음하는 분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향해 달려 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가서 예수님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죄도 용서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 앞에는 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죄의 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랑의 갈증을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까? 얼마든지 우리는 사랑의 갈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는 사랑으로는 우리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저 갈보리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십시오. 거기에 가면 큰 사랑이 있습니다. 큰 사랑이 있습니다.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임하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나라의 평화, 그 나라의 사랑, 그 나라의 용서, 그 나라의 능력, 그 나라의 사유함, 구원이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은혜의 샘이 솟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복음의 출발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일주일 내내 아니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붉은 죄가 눈 같이 희어졌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 되었고 딸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찌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보면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좀더 가까이 가보고 싶고 좀더 알고 싶어하는 안타까움과 갈증이 마음에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왜 그가 찔리셨는지 왜 상하셨는지 이 골고다 언덕에 모두 나와 성령의 인도 속에 내 삶에 진정한 궤도 수정에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은 ‘죽음’이라는 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죽음이 진정 가치 있는 죽음일까요? 그냥 숨을 거두는 것이 전부일까요? 아니면, 무언가를 남기고, 무언가를 위해 죽는 것이 의미 있는 죽음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단순한 끝이 아니라, 생명의 시작으로 보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처럼 주님의 죽음을 통해 많은 생명이 살아나고, 우리도 그 생명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고난주간, 우리가 함께 바라봐야 할 것은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고통스럽고 처절했지만, 가장 거룩하고 가장 의미 있었던 죽음. 그 죽음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았고, 그 사랑 안에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그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함께 묵상하며, 우리 인생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또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생각 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이사야는 특히 40-66장을 구약 속의 신약이라 부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자로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게 될 사건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그중의 한 장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겪으실 고난과 승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온갖 멸시와 천대, 굴욕과 고통을 다 겪으셨고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한 생을 바쳐 사역의 자리에 섰던 이사야는 누구입니까? 이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사야는 남왕국 유다가 역사적으로 위태로운 때 선지자로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이때 그가 전한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여호와께서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는 그 이름의 뜻대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며 선지자의 사역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Ⅰ. 그가 받은 소명
사 6장을 보면 이사야는 자신이 소명 받을 때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1절을 보면 “웃시아 왕의 죽던 해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부르심을 받은 때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웃시아 왕은 남왕국 유다 왕 중에서 나라를 크게 부흥시킨 손꼽히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만해 져서 성전에 들어가 향을 피우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로 문둥병이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국가적인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외적으로는 부유했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히 병들어 있었습니다. 형식적인 종교생활, 공의가 무너진 사회, 우상숭배가 만연하던 시대였습니다. 청년 이사야는 조국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 때 어느 날 성전에서 기도할 때 환상을 보게 됩니다. 성전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그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신은 너무 초라한 죄인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한 스랍이 제단의 핀 숯을 입술에 대주면서 죄가 사해졌다는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난 뒤의 하나님의 소명을 받습니다.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듣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답을 했습니다. 이사야는 이 소명사건 이후에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이사야는 왕들과 가까운 친척으로 왕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권력을 추구하고 세상적 성공을 꿈꾸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명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자신의 꿈을 좇는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폴 손이라는 분이 쓴 [청년의 시간](Quater Life Calling)이란 책을 보면 자신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된 이야기를 써놓았습니다. 이분은 20대 중반에 세계최대항공사인 보잉사에 입사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고 자신도 매우 기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회사생활이 힘이 듭니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 회의가 듭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나는 왜 살고 있나?”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들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마음이 힘이 들까요?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그런데 기도 중에 그런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폴! 네 질문이 잘못되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묻기 보다는 자신이 바라는 일들을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어.” 이때부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즉 소명을 생각하게 됐고, 그러면서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힘이 드는 이유는 많은 경우 우리 인생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원, 자신의 기대에 인생의 방향을 맞추고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기대에 인생의 방향을 맞추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 살기가 힘들다고 여겨질 때는 한 번 우리 인생의 방향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내 인생의 방향이 잘못되어있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많은 것이 달라야 하는데,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인생의 방향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자기가 바라고 기대하는 목표를 향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소명을 향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Ⅱ. 그가 붙들고 나갈 소명은 무엇입니까?
이사야가 소명을 받은 때 그의 나이가 20세 쯤 되었습니다. 이때가 주전 739년입니다. 그리고 그가 순교한 때는 므낫세 왕 때로 주전 680년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는 선지자로 소명을 받은 후에 59년을 선지자로서 소명을 감당했습니다. 왕이 네 번 바뀌고, 공격해 오는 적들이 바뀌고, 시대상황이 아무리 바뀌어도 일관된 믿음으로 일관된 메시지를 정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자칫 변화의 흐름 속에 우리의 믿음도 흔들리고 변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이사야처럼 초지일관의 믿음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그가 가졌던 사명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의 삶을 버팀목처럼 지켜주었고 한 생을 그 말씀을 따라 살았던 복음- 4-6절입니다. 다 같이 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Ⅲ. 메시야의 모습: 고난받는 왕
이사야는 53장에서 메시야가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상세히 전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여러분, 이사야가 본 메시야는 로마 군대 앞에서 칼을 들고 나타나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상처입고, 묵묵히 침묵하며 끌려가는 어린 양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여러분, 예수님은 이유 없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게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 놀라운 비밀을 수백 년 전에 보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보라! 그분을 주목하라! 너희를 대신할 메시야다!”
52:13절에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우선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 말은 그냥 “한번 봐라”가 아닙니다. “눈을 들어 제대로 봐라. 너희가 지금 놓치고 있는 진짜 희망을 바라봐라.”는 외침입니다. 무엇을 보라는 걸까요? 바로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받는 종으로 오시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지만,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형통케 할 것이다.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자그만치 보라는 단어가 이사야에 70회나 나옵니다. 이사야는 평생을 이 복음을 가지고 60 여년 동안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를 외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사야 53장은 오늘 고난주간을 보내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십자가를 바라보라, 예수님을 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뉴스, 정치, 전쟁, 고통 속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 종을 보라! 그가 너를 위해 고난받았노라!” 예수님의 고난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심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난주간에 다시 결단해야 합니다. 이 고난의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믿고 따르겠다고. 이사야처럼 외면당해도, 환영받지 못해도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골고다 언덕에 올라왔습니다. 한평생 맹인으로 살았지만, 영감이 넘치는 찬송가를 많이 남겨서 지금도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감동시키는 찬송 작가 패니 크로스비가 쓴 496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소서/ 거기에 값없이 주시는 보배로운 샘/ 갈보리 샘으로부터 흐르는 치유의 시내가 있나이다/ 십자가에 가까이 의지하고 서서 거기서 천국 가도록 항상 머물겠네.' 항상 십자가 곁에 머물기를 사모하는 작가의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찌 작가 혼자의 마음이 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찬송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다시 한번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오늘 우리 중에 왜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왜 죄인이라고 하는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아서 잘 깨닫지 못하는 분이 행여나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십자가의 길을 이 고난주간 한 번 따라가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죄 없는 분이 양발, 양손에 못이 박혀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그 갈보리 언덕으로 한 번 올라가 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그분의 얼굴을 우러러 보십시오. 당신이 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인지 해답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이 왜 죄인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 믿지만 죄책감에 끌려 다니며 신음하는 분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향해 달려 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가서 예수님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죄도 용서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 앞에는 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죄의 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랑의 갈증을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까? 얼마든지 우리는 사랑의 갈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는 사랑으로는 우리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저 갈보리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십시오. 거기에 가면 큰 사랑이 있습니다. 큰 사랑이 있습니다.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임하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나라의 평화, 그 나라의 사랑, 그 나라의 용서, 그 나라의 능력, 그 나라의 사유함, 구원이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은혜의 샘이 솟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복음의 출발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일주일 내내 아니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붉은 죄가 눈 같이 희어졌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 되었고 딸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찌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보면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좀더 가까이 가보고 싶고 좀더 알고 싶어하는 안타까움과 갈증이 마음에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왜 그가 찔리셨는지 왜 상하셨는지 이 골고다 언덕에 모두 나와 성령의 인도 속에 내 삶에 진정한 궤도 수정에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