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 주는 사랑, 가리는 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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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5-11본문
“덮어 주는 사랑, 가리는 효도” – 어버이 주일 창 9:20-27. 2025. 5/11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잠시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요즘 세상은 너무 거칠고, 삶은 너무 퍽퍽합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고, 책임감 하나로 하루를 버텨내고, 돌아오는 저녁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소파에 털썩 앉는 아버지들. 어떤 아버지는 말합니다. “나는 가족을 위해 기름칠 되어버린 기계야. 말은 안 해도 마음은 늘 무겁지.” 이런 아버지의 어깨를 보면, 고개를 떨군 그 모습에서 말없이 흘리는 아버지의 눈물이 보입니다.
우리나라가 자살율이 세계에서 최고인데 특히 아버지의 자살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우리나라 자살율은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습니다. 23년 집계가 인구 10만명당 27.3명으로 이웃나라인 일본보다 두배가 높은 수치입니다. 그 가운데 60세 이상 되시는 분들 가운데 여성이 인구 10만 명당 16.5명인데 남성 자살율이 무려 63명이나 됩니다. 아버지의 자살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가정에서 대화는 줄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마음의 거리도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령화의 진행 속에 부모를 공경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원망하는 자녀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창세기 9장, 노아의 가정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한때는 하나님 앞에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창6:9의 말씀을 보시면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세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고 홍수 심판 후 새로운 세상을 시작한 믿음의 조상이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는 그런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실수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21절을 보시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고 나옵니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 노아 같은 믿음의 사람도 이런 실수를 하나요?”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 장면은 부모도 연약할 수 있다는 것,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부모님도 사람이기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도 자식으로서 때로 실망할 수 있지만, 부모님의 인생 전체를 그 한 장면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노아는 홍수 이후 땅을 일구고,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장막 안에서 잠들고 맙니다. 믿음의 거장이 무너졌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인간적입니다. 아버지도 연약합니다. 늘 강할 수 없습니다. 실수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판단도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실수 하나가 가정을 흔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아버지들이 그렇게 무너집니다. 과로에 무너지고, 중압감에 무너지고, 삶의 허무와 외로움에 무너집니다. 그럴 때 가족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가정이 다시 세워질 수도,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자녀들이 부모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갈리는 아주 중요한 장면이 나옵니다.
Ⅰ. 자녀들의 반응 – 함 vs 셈과 야벳 (9:22-23)
노아의 실수를 처음 본 사람은 셋째 아들 함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형들에게 말합니다. 이건 단순한 전달이 아닙니다. 조롱과 비난의 언어입니다. 아버지를 무너뜨리는 말입니다. 22절에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알리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함은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하체가 드러난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보다’는 단순히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의도를 갖고 응시하며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알렸다’는 말은 함은 아버지의 실수를 은밀히 덮어준 것이 아니라 그 부끄러움을 들추고, 형제들에게 퍼뜨린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부모의 실수를 남에게 험담하고, 창피를 주는 말로 떠벌리며 흉을 본 것입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어떻습니까? 23절을 보시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뒷걸음질쳐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체를 덮었다”고 하죠. 이 ‘덮다’는 이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가리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으로 허물을 덮고 보호하는 행위입니다. 이 모습이 진정한 효도의 자세입니다. 부모의 허물을 덮는다는 것은 죄를 눈감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난과 조롱 대신 존중과 사랑으로 대한다는 태도를 말합니다.
엡6: 2절을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십계명 중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여기 ‘공경하라'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즉, ’공경한다'는 것은 ‘무게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신 부모님께는 우리가 도저히 흉내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경륜의 � �게, 인식의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무게를 인정하면 귀히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무게'란 ’긍지'와 동의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 인생의 무게를 존중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만약 이 긍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부모님의 무게를 인정하기는커녕 깃털보다 더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란 함께 모시고 사느냐 아니냐, 용돈을 얼마나 드리느냐, 얼마나 호강을 시켜 드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참된 효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에 대한 긍지 여부에 따라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Ⅱ. 우리 부모의 희생을 아는 것이 효도입니다. 히11:7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노아가 살던 시대는 어땠습니까? 창세기 6장에 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온통 타락했어요. 정의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자기 욕심만을 따라 살았죠. 그런데 그 어두운 시대 가운데, 노아는 달랐어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야, 내가 세상을 심판하겠다. 너는 방주를 지어라.”
성도 여러분, 방주요? 당시에는 비도 내리지 않았던 때입니다. 홍수라는 개념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걸 믿고 방주를 짓는다? 그것도 120년 동안 묵묵히 순종하는 아버지 노아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조롱을 받았을까요? “저 사람 미쳤다!” “저 노인네 뭐 하는 거야?” 그러나 노아는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노아는 그 시대의 풍조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다 그렇게 살아. 적당히 해.” 이런 말들 앞에서 노아는 ‘아니요.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삽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여러분, 모든 인류가 홍수로 다 심판당할 때 함이 누구 때문에 살았습니까? 아버지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일백 이십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이 다 살아남았습니다. 훌륭한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살아남았다면, 비록 아버지에게 허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덮어주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철환 씨의 <연탄길>이란 책이 있습니다.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은 이야기들을 묶은 책입니다. 많은 독자들에게 짠~ 하는 감동을 주는 책인데, 그 가운데 ????아버지의 우산????이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시절 달동네에 살던 사람이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글입니다. 아버지는 고물 장사를 하며 고생했습니다. 철이 없는 그는 그런 아버지가 창피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가 돈을 조금 모아 식당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실패하고 맙니다. 이제는 어머니와 우유 배달을 합니다. 설사가상으로 교통사고로 부상당해서 깁스를 하고 집에서 쉬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 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천정에서 비가 주룩주룩 새서 양동이를 받쳐놓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한숨만 나오는데, 아버지가 속이 상했는지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밤이 깊어져도 돌아오지 않자 식구들이 찾아 나섭니다. 동네를 다 뒤져도 아버지를 못 찾자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들어오는데 지붕 쪽에서 시커먼 물체를 발견합니다. 아버지였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안간 힘을 쓰며 우산을 받치고 물이 들이치는 지붕을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최선을 다해 가족을 보호합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 인생에 늘 든든한 기둥이 됩니다.
Ⅲ. 하나님의 판단 – 저주와 축복의 분기점 (9:24-27)
그 결과 하나님은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24-25절에서 노아가 깨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는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를 선포합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1)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반면 26-27절에서는 셈과 야벳에게 축복을 선언합니다.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자, 이 장면은 단순한 ‘노아 개인의 기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부모를 향한 태도를 중요하게 보신다는 메시지입니다. 부모의 허물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의 기준을 정하셨습니다.
24-27절까지를 보면 [가나안]에 대한 저주가 있고, [셈]의 영적 축복,그리고 [야벳]의 물질적인 번영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26절을 보면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는 축복의 선언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정말 귀한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말은 엄청난 복을 말합니다. 셈에게도 엄청난 영적 축복이 담겨져 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셈은 믿음의 계보의 주인공이 됩니다. 후에 아브라함도, 예수님도 이 셈의 계보에서 나옵니다. 야벳도 그 믿음 안에 함께하게 됩니다.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야벳의 지경을 넓혀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야벳이 받은 복입니다.
그런데 효도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불효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함’에게 내려진 것은 저주였습니다. 18절을 보면 함에 대해 소개할 때 남다른 소개가 붙어 있습니다.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22절에도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그랬습니다. 급기야 25절에서는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라고 불효에 대한 저주가 아버지를 업신여겨 조롱거리로 삼았던 당사자인 함이 아니라 그 아들 가나안에게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부모를 무시하고 거역하는 자에 대해 매우 강하게 경고하십니다. 출21:17절에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잠언 30:17절에도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여러분, 자식의 고통은 부모에게 몇백, 몇천배의 고통이 되는 법입니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지 자식이 아픈 것을 부모는 못 견뎌합니다. 오늘 함의 입장에서 보면 차라리 내가 저주를 받는 게 낫지 자식이 저주에 떨어야하는 것을 어떻게 볼일입니까? 이런 의미에서 아들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가 아버지 함에게는 엄청 가혹한 형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보다 더한 형벌이 어디 있겠습니까?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잘 공경한 결과 번영과 창대의 축복을 대대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어버이 주일에 아버지에 대해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삼하19: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왕은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라.” 이 장면은, 한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입니다. 자기에게 반역하고 군사를 일으켜 죽이려고 했던 아들인데, 그 아들이 죽었을 때, 다윗은 울었습니다. 아니, 그냥 우는 게 아니라 큰 소리로 울며 부르짖었습니다. “내 아들아, 압살롬아!” 그리고 말합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으면 하고 통곡하며 웁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한 나라의 왕이기 전에,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압살롬은 원래부터 나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는 잘 생겼고, 카리스마가 있었고, 백성들에게도 인기 많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를 반역하는 자리까지 갔을까요? 그 시작은 가정의 상처였습니다. 이복형 암논이 자신의 누이 다말을 범했을 때, 다윗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이 압살롬의 마음을 뒤틀어 놓았습니다. 결국 그는 암논을 죽이고, 집을 떠나버리죠. 그러고 나서도 다윗은 오래도록 그를 다시 품지 못합니다. 압살롬은 사랑받고 싶었지만, 아버지에게서 그 사랑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허전함이 결국은 반역으로, 비극으로 이어진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에도 다윗과 같은 아버지들이 많습니다. 자녀와 갈등을 겪고, 관계가 어긋나고, 후회하며 눈물 흘리는 아버지들 말입니다.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속으로는 “내가 아버지로서 잘 못 한 건 아닐까?”라고 자책하는 아버지들입니다. 특히 요즘 세대는 세대 간의 소통이 너무 어렵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말이 없고, 자녀는 자녀대로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서로가 서운하고, 멀어지며 결국은 회복의 기회조차 놓칩니다.
혹시 마음이 멀어진 자녀가 있으십니까? 혹시 부모와 서운한 감정을 품고 계십니까? 지금이라도 다가가십시오. 전화 한 통, 문자 하나, 작은 대화 하나가 관계의 회복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다윗의 눈물은 단순히 한 아버지의 슬픔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자녀와 부모,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돌아보며 더 늦기 전에 용서하고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혹시 마음속에 묻어둔 상처가 있다면, 오늘 용서하시고 품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이 생존해 계시다면 표현하십시오. “사랑합니다, 감사해요, 기도하고 있어요.” 이 작은 말 한마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복의 시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의 부모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분들의 부족함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품게 하시고, 셈과 야벳처럼 부모를 존중하며 섬기는 믿음의 자녀 되게 하소서. 가정의 달, 어버이주일에 우리의 가정이 다시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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