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 가득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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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1-14본문
기쁨이 가득한 공동체 눅10:17-21. 2025. 1/12
어느날 예수님은 마11:28절에 우리 인생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 우리의 마음에 와닿습니다. 다 동의가 되시지 않습니까?? 요즘 대한민국의 현실은 탄핵 정국 속에서 정치적 혼란과 국민적 분열로 인해 많은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습니다. 혹독한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광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외침 속에는 인간의 힘과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 미친 광풍을 막을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는 피곤한 삶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인생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이라 말씀을 합니다. 여기서 ‘수고하다’라는 말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온갖 모든 힘든 일들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짐진 자들아’ 할 때 이 짐은 가벼운 짐이 아닙니다. 등산할 때 등에 메는 백팩이 아닙니다. 이것은 너무나 힘들어 또는 내 힘으로 견딜 수 없도록 마딱 드리는 인생의 짐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인생의 짐을 아주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웃음입니다. 웃음을 통해 인생의 짐을 설명을 합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많은 특징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아이들은 잘 웃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태어나고 여러분의 손자 손녀가 태어나면 그 갓난아이 앞에는 유머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유모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웃죠? 까꿍!! 질리지도 않는가 봅니다. 까꿍하면 숨이 넘어가듯이 웃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잘 웃던 아이들이 점점 점점 자라면서 뭘 잃어버리는지 아세요? 웃음을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지나가는 어른에게 깍꿍 해보세요? 웃을까요? 웃기는커녕 빰맞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왜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웃음이 사라질까요? 심리학자들은 그 이유가 다름이 아닌 나이가 들면 우리가 인생의 짐의 무게를 많이 느끼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 살수록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생의 짐의 무게를 끄게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순간 감당하기 어려운 인생의 짐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삶을 가까이서 살펴볼 때가 많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누가 나에게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야 묻는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가장 힘든 일은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짐을 지고 무너져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힘들어요.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어떤 사람은 관계의 아픔으로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불어 닦친 사고로 어떤 사람들은 어느날 의사를 만나고 내린 진단 앞에 무너져 내립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무너져 내립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내 보내고 주저앉은 사람들, 얼마든지 내가 대신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 자녀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사람들... 여러분, 누구라서 이 인생의 짐을 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니 누구라서 이 인생의 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그것이 우리입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이 인생의 짐 앞에 사실은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 인생은 그리 수고로운가요? 왜 이렇게 살기가 빡빡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 우리에게 인생의 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여러분, 누구라서 이 인생의 짐을 져보지 않았겠습니까?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 어깨에는 수많은 인생의 짐이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전도를 위해 70명을 보냈습니다.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라. 복음을 전하고 병자는 고치고 귀신은 내쫓고 능력을 나타내면서 역사하라" 그랬어요. 주님이 능력을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귀신보고 "나가라!" 그러니까 다 나가주는 거예요. 이것이 얼마나 신기합니까? 자기들도 깜짝 놀랐을 겁니다. 이런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자기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자기들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나고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쫒겨나고 희한한 일들을 많이 경험하고 돌아와서 지금 보고대회하는 것입니다. 그 성과를 놓고 서로 일을 자랑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면서 "그거 별로 기뻐할거 없네. 참으로 기뻐할 것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 그 외에는 그리 기뻐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Ⅰ.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기쁨과 주님의 기쁨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왔다’고 할 때 ‘기뻐하다’(카라)는 단어는 흥분된 상태에서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전도하러 나갔다가 귀신 들려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떠나가라!’ 그러자 귀신들이 항복하고 떠나갑니다. 귀신 때문에 괴롭힘을 받던 사람들이 치유되고 고침을 받습니다. 이 인생의 짐이 벗겨지니 이처럼 놀라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흥분되고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그 보고를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절에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제자들이 전도하면서 귀신들을 제압하고 복음을 전한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예수님께서도 무척이나 기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할 때 ‘기뻐하다’는 단어는‘제자들이 기뻐했다’고 말할 때 쓰인 단어와 다릅니다. 제자들이 기뻐했다는 단어는 ‘흥분된 상태에서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할 때 쓰인 단어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기뻐서 펄쩍펄쩍 뛰는 모습, 춤을 추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표현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제자들에게 항복하고 제자들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복음이 전해지는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펄쩍펄쩍 뛰면서 기뻐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처럼 기뻐하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소망없는 인생이 새생명으로 구원받은 일이 일어날 때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한 것입니다. 왜 이처럼 기뻐하셨습니까?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에덴의 그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실제로 주의 구원을 맛본 사람들은 이 기쁨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Ⅱ. 참된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은 유달리 눈물이 많습니다. 웃음보다 슬픔이 발달한 민족입니다. 연속극을 봐도 눈물을 찔찔 흘리는 연속극을 봐야 속이 후련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많이 우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인 것처럼, 늘 심각한 표정을 짓는 사람만이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맙시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반대의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라 기뻐하라. 기뻐하라. 네가 당장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기뻐하라.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합해서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으로 만들어가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14장 17절은 하나님 나라의 가장에 대한 특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희락이 무엇입니까?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누리는 의와 평강과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5:1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의 말씀을 일러주시는 것은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넘쳐 충만케 하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마치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그렇게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예배당을 찾을까요? 성서신학의 대가 윌리암 바클레이는 말했습니다. "기쁨이란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이다." 성경에는 기쁨이란 말이 800번 이상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기뻐 하십시오.
여러분! 처음 예수 믿고 구원 얻은 감격 속에 신앙생활 할 때 우리에게 어떤 신앙행위가 있었습니까? 주님을 생각하며 눈물도 많이 흘리셨지요? 날 새는 줄도 모르고 기도도 해보셨지요? 내가 믿는 예수가 너무 좋아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처럼 예수 믿고 기쁘게 살아보라’고 전도도 많이 했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그렇게도 미웠던 사람들이 천사처럼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들이 다 우리가 가져야 할 주님이 원하시는 ‘처음 행위’입니다. 첫사랑의 행동을 되찾아야만 첫사랑의 감격이 우리 안에 오래 오래 간직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리셨다면 첫사랑의 자리를 추억하시면서, 또 첫사랑의 감격 속에 행하던 모든 신앙 행위를 다시 찾으셔서 첫사랑의 감격으로 기쁘게 신앙 생활하시기 바랍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빌4:4절에서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우리가 구원 얻을 때 주님께서 주신 기쁨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성령 안에서 주님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저마다 해결하기 힘든 문제 때문에 염려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Ⅲ. 교회는 기쁨을 나누는 웃음의 공장입니다.
교회는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웃음을 되찾게 만들어주는 ‘웃음공장’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웃게 만들어줄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 웃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먼저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내가 먼저 웃어줄 때 내 주변은 웃음이 가득한 세상이 됩니다. 특별히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예배를 통해서 구원의 감격이 회복됨으로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다른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소소한 일상의 기쁨을 맛보며 살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기쁨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유인경이라는 작가가 쓴 [기쁨채집]이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제 나는 기쁨을 채집하고 있다. 공기처럼, 혹은 별처럼 구름처럼 내 주변에 가득하지만 내가 눈길을 안 주었거나 잘 느끼지 못했던 작은 기쁨을 수시로 채집해서 내 가슴에 담아두고 또 남들에게도 나눠주려 한다.” 기쁨을 채집한다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책에서 나온 기쁨들은 드라마틱한 것이나 거창한 것, 나만 체험한 대단한 것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도 기쁨이 되나 하는 소소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채집하듯 찾다보면 어느새 인생이 큰 기쁨의 꽃다발을 들고 있는 것처럼 풍성해 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놀이동산에 막 도착한 아이처럼, 여름방학을 맞은 학생처럼” 인생이 설레게 되고 가슴 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공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이차 한잔을 손에 들고 그 향을 마실 때 마음까지 따뜻해지며 소소한 기쁨이 밀려옵니다. 카카 오폭으로 손녀와 이야기를 나눌 때 아이의 재롱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나며 소소한 기쁨에 취하게 됩니다. 이런 소소한 기쁨들이 삶을 행복하게 채워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소소한 기쁨 외에 차원이 다른 기쁨이 또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합 3:18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특별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프랑스에서는 딸이 세 살이 되면 아버지가 딸에게 거울을 사준다고 합니다. 거울을 보면서 얼굴에 미소 짓는 것을 연습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너의 얼굴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항상 기뻐하며 웃으며 사는 것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웃는 얼굴로 사는 것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웃으며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기쁨을 얻으시고자 우리에게 웃으며 기쁘게 살라고 말씀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처한 환경 때문에, 또 해결되지 않은 인간관계의 상처 때문에 이런 힘든 고비고비가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지 않습니까? 여러분, 잊지 마세요. 우리가 항상 기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구원의 감격을 주셔서 그 감격으로 인해 기뻐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웃으며 사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절망과 낙담으로 거의 포기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인생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웃을 수 있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방황하며 슬픔의 사슬에 매여 있는 우리에게 영생의 기쁨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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