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만을 우러러 바라보라-사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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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1-19본문
하나님만을 우러러 바라보라 사40:27-31. 2025. 1/18 주일 설교
오늘날 우리는 심각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갈등,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경쟁 속에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권력이 정의를 압도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합니다. 약자의 목소리는 묵살되고, 오직 힘이 결과를 좌우합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사야 40장은 바로 이런 의문 속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유다 왕국은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이국만리 바벨론으로 끌려왔습니다.
그렇게 끌려온지 70 여 년이 가까워 오건만, 조국 광복의 희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니, 세월이 갈수록 희망은 더욱 희미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70년은 실로 너무 긴 세월이었습니다. 잡혀 왔던 이민 1세대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났고, 고국에 대한 기억도 전혀 없는 2, 3세대만이 살아남아 있는 지금, 나라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포기한 사람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다가 지쳐 버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위로의 말씀을 주신 것이 바로 이사야 40장에서 66장까지의 말씀입니다. 그중에서 특별히 40장 말씀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Ⅰ.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모습 27절
27절은 말씀합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이것을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희가 어찌 '하나님은 내 사정을 돌아보시지 않으신다. 내 원통함을 풀어주시지 않으신다' 말하느냐?" 2,500년 전 바벨론 땅에서 울부짖던 유다 백성들처럼 오늘날에도 똑같은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성도들 가운데에 ‘나는 삶에 지쳐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뛰어다니며 일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일터의 재정 압박과 악순환 때문에 거의 탈진되어 있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오래도록 앓고 있는 지병 때문에 새해를 맞이해도 점점 자신의 모습 속에서 삶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즘 사업장 심방을 하지만,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정신적이며 영적인 부분에 지쳐서 무력감과 탈진으로 인해 삶의 에너지가 다 고갈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대인들의 정서적 질환 중 하나가 우울증과 무기력증이지요. 어느 순간에 갑자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맥이 빠져서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며,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증 이것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영적 탈진 또는 소위 영적 침체입니다.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당시 이스라엘은 우리의 어려운 사정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하나님,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전혀 응답해주시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불평의 소리를 내뱉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셨다. 우리의 이 원통함, 이 사정을 하나님께서는 알지 못하신다. ’ 그때부터 그들의 삶은 피곤해지기 시작하였고 일을 해도 재미가 없었으며 신앙생활에 대한 감격도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리로, 낙심의 자리로 들어갔다는 말인데 이럴 때 인간의 삶이 무기력하고 허망해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불평하는 이스라엘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도 이런 일들을 당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혹 성도들 중에 이런 상황 속에 있는 분들 계십니까?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교회는 출석하지만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어 그 마음속에 이미 좌절과 포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 49:14-17절에 보면 주님은 말씀합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고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문제는 너무 큰데 그 문제를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부족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향해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Ⅱ. 오직 여호와를 앙망(仰望)하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여기 ‘새 힘을 주신다’는 의미는 문자적으로 힘을 바꾸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건전지를 새 것으로 바꾸어 끼듯이 새 에너지를 공급해준다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새 힘을 공급해주신다는 이 말은 끊임없는 새 힘의 재창조, 즉 재충전을 시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우리를 힘들게 하는 주변 여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안에 열정도 헌신도 점점 무뎌져 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지 않겠어요. 자신감은 점점 없어지고/ 불안해 지고 /두려워지고/ 사는 것이 겁나고/ 무능한 자신 남처럼 앞서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나중에는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붙들어 주는 손도 없고/ 기댈만한 것도 없고/ 결국은 우울증에 빠지는 비참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힘이요. 힘입니다. 세상을 살게하는 힘이요./ 벌떡 일어나게 하는 힘이요./ 자존심을 살려주는 힘이요,/ 절대로 기죽지 않는 힘이요, 비틀거릴 때마다 붙들어 주는 강한 손이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면서 살 수 있는 감사하는 만드는 힘입니다. 힘이 필요해요, 세상에 살게 하는 힘이 필요해요, 내 안에 없는 힘이 필요합니다. 어디서 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향해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붙들고 그 분의 그 놀라운 사랑을 내 마음에 다시 한번 체험할 때,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런 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 앙망이라는 말은 주님만을 믿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기대를 걸어본다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배를 잘 드리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 27:04절에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여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뿐만 아니라 ‘앙망’이라는 말의 뜻에는 강하게 비틀어서 꼰다는 뜻으로서의 밧줄의 의미도 또한 담고 있습니다. 이는 여러 가닥을 엮어 꼬아서 더 튼튼한 줄을 만든다는 의미인데 바로 우리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함이 한데 엮어져 나의 약함은 완전가려지고 하나님의 강한 능력만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나오는 이러한 새로운 힘입니다. 이 힘은 세상적인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힘으로서 영혼의 만족을 얻게(시 63:15) 하는 힘입니다. 혹 성도들 가운데 이런 상황 속에 있는 분들 계십니까?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고 계시는 분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는 출석하지만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어 그 마음속에 이미 좌절과 포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의 말씀에 한 번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30절에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한창 자라는 소년에게는 피곤하다 곤비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기 ‘장정이란’ 임무수행을 위해 특별히 뽑힌 일꾼들입니다. 그럼에도 넘어지며 자빠진다고 했습니다. 맥없이 기운을 잃고 비틀거린다는 말이에요. 그럴지라도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이 넘치도록 솟아날 것입니다. 그 어떠한 상황이나 경황 중에서도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지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날마다 새 힘을 공급받으며 생동감 있게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자신을 앙망하는 자에게, 올라가는 신앙을 갖게 하십니다./달려가는 신앙을 갖게 하십니다./성취하는 신앙을 갖게 하십니다./앉은뱅이를 뛰게 하십니다./엠마오로 낙향하던 두 제자에게 새 힘을 주심으로 인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사명을 회복시키십니다(눅 24:13~35). 성도들 중에 이런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방황하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십시오. 하나님이 자기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독수리처럼 지치지 않고 날개치며 올라갈 수 있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기록을 보면 무려 지상에서 11킬로미터까지 날아오른 독수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 어떤 새들이 흉내를 낼 수 있을까요? 이 비상이 힘든 것은 중력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독수리는 종류에 따라 무게 차이가 나지만 저 몽골 초원을 나는 독수리는 15킬로그램이나 나간다고 합니다. 그 무거운 몸으로 저 높은 하늘을 비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거센 바람의 저항과 싸워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날개 치며 올라감”이란 말이 바로 이 비상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비상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독수리의 비상을 세밀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독수리가 비상할 때 하늘을 바라봅니다. 사실 독수리는 주로 하늘을 날며 땅을 바라봅니다. 먹이감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가끔 하늘을 비상하려고 할 때 고개를 들고 저 높은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또 얼마나 비상할 것인지를 판단합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해 줍니다. 영적인 부흥을 꿈꾸는 사람들은 마치 독수리가 비상할 때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고개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봐야 합니다. 평소에 앞을 보며 살았고 또 땅을 내려다보며 살았을 지라도 부흥을 위해서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봐야 합니다. 고개를 들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전한 기독교’를 쓴 C.S. 루이스가 “하늘을 겨냥하라 그러면 땅을 덤으로 줄 것이요, 땅을 겨냥하라 그러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앙망(仰望)은 단순히 하늘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뜻을 추구하는 삶을 뜻합니다. 비전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현실 앞에 주저하지 않고 내게 능력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내 인생을 맡기십시오.
그러나 땅만 바라보며 세속적 가치와 욕망에 매달릴 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공허함과 불안을 보여줍니다. 참새와 독수리가 나는 것을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참새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날개를 펄럭거리며 납니다. 오직 자기의 날개짓으로만 납니다. 그래서 멀리 날지도 못하고 또 높이 날지도 못합니다.
Ⅲ. 앙망하는 자는 성령의 능력을 입게 됩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다릅니다. 처음에 날개짓으로 날아오르다 상승기류를 발견하고는 그 기류에 올라탑니다. 날개를 활짝 펼치고 그 상승기류에 몸을 맡깁니다. 그리고 저 높은 하늘로 비상합니다. 이것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해 줍니다. 바로 부흥은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점입니다. 그래서 독수리가 비상할 때 상승기류의 도움을 받는 것처럼 성령의 상승기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강력한 바람을 받아야 합니다. 행 2:1-2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초대 예루살렘교회에 성령이 강림할 때 모습입니다. 한 마디로 강력한 성령의 바람이 불었다는 것입니다. 실패자들 포기하고 절망하는 그 자리에 성령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강력한 성령의 바람을 맞으면서 그 자리에 부흥이 시작됐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됐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죽기내기로 기도한 때입니다. 죽기 내기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능력의 교회로 변화됐습니다. 개개인도 교회도 드디어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패배자가 아닙니다. 죽기 내기로 전도했습니다. 복음만이 세상을 살릴 수 있다는 모습으로 자신들을 괄시하고 무시하던 자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300명 5000명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습니다. 부흥은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시작됩니다. 상승기류를 만나야 독수리가 비상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상승기류를 타야 부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소서. 우리 각자의 심령에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소서. 우리 교회에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소서.” 기도합시다. 아멘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앙망함으로써 피곤하고 곤비하며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이 되지 말고 도리어 새 힘을 얻어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과 같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신앙과 순종, 영성과 도덕성의 고도를 더욱 높여 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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