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17)-이방선교의 교두보, 고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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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2-09본문
이방 선교의 교두보 – 고넬료 행10:1-8 ⑰ 2025. 2/9
여러분 가운데 ‘교두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원래 군사 용어로, 강이나 해안 등 장애물을 건너, 적 지역으로 진입할 때 일시적으로 확보하는 거점을 의미합니다. 전쟁을 할때 교두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그냥 적진에 발만 들이는 게 아닙니다. 확실한 발판을 만들어야 후속 부대가 들어오고, 보급도 원활하게 이뤄지면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겁니다. 이차 세계대전을 끝낼 수 있었던 것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나 우리나라의 인천 상륙 작전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교두보였습니다. 전쟁이든, 경제든, 심지어 신앙에서도 교두보가 있어야 승리를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작은 거점 하나라도 확실하게 잡아야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자녀 된것은 나를 통해 복음이 널리 증거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고넬료라는 사람을 통해 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고넬료는 로마 백부장으로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방 선교의 문을 여는 교두보의 중요한 역할을 고넬료에게 맡기셨습니다.
Ⅰ. 고넬료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먼저 사도행전 10장 1-2절을 보면, 고넬료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탈리아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여러분, 로마 백부장은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강대국 로마의 군대 장교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방인인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믿은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 –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구제하는 삶 – 어려운 사람을 돕고 선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구원의 길을 온전히 알지 못했던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어느 날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을 때 환상 중에 천사가 나타납니다. 3-4절에 "하루는 제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천사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으니“
여기 '기억하신 바'로 번역된 헬라어 '므네모쉬unyoouvov'은 본래 '기념물', '기념비 memorial'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고넬료의 기도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은 물론이요, 하나님 앞에 기념비로 세워졌습니다. 대체 고넬료의 기도가 어떤 기도였기에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념비가 되었겠습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념비로 세워진 것은 단순히 고넬료의 기도만이었던 것이 아니라, 삶속에 일어난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구제를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요일3:16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이것이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될 정도로 고넬료가 경건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방인이었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직 접해 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넬료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 주시기 위하여 가이사랴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욥바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체류 중인 베드로를 청하게 했습니다.
Ⅱ. 편견의 벽을 너머 13-15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욥바에 도착할 즈음에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는 시몬의 집 지붕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기도하던 중 환상을 보는데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가 내려오고, 그 안에는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곤 이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13절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베드로는 그것을 잡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으로 자란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음성이 들립니다. 15절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베드로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한사코 거절해요. “주님, 제가 이런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아라.” 그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당시에 뿌리 깊은 유대인의 전통과 율법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부정하다”, “하나님의 복은 유대인에게만 해당한다”라는 생각이 유대인들에게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에게도 “이방인은 죄인이다. 접촉하면 자신도 부정해진다”라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편견이란 쉽게 말하면, “사실이나 진실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속에 자리 잡은 생각이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나 태도가 참 굳어요. 마치 망치로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단단합니다.
그런데 이런 편견이 한 번 자리 잡으면, 상대가 아무리 친절을 보여주고, 밝게 웃고, 잘해줘도 잘 안 믿게 됩니다. ‘아니, 저 사람은 원래 차갑다니까.’ 이렇게 계속 자기만의 울타리를 세우고 견고하게 지키죠. 심지어 상대방의 좋은 점까지도 왜곡해서 보게 됩니다. 이 편견은 우리 신앙생활에도 고스란히 들어옵니다. 이처럼 우리가 제아무리 믿음이 좋고, 예수님과 가까이 지낸다 해도, 사람에게는 누구나 편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편견을 고치는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습관 하나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습관 하나 바꾸는 데 때로는 몇 개월, 몇 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하물며 우리가 자라왔던 문화와 전통을 바꾸는 일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러나 이 굴절된 편견이 내 안에 자리잡게 되면 내 자신뿐만 아니라 내 주변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편견을 깨뜨리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나의 기준과 시선 대신에 주님의 기준으로 보는 거예요. 베드로 역시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아라.” 이 말씀 한마디가 베드로의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과연 성경적 시선과 부합하는가?’ 늘 점검해야 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직접 고넬료의 집에 찾아갔어요. 처음엔 그 집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편하고 거북스러웠을 겁니다. “이방인 집에 내가 들어가도 되는가?” 싶었겠죠. 하지만 막상 고넬료와 가족들을 보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성령을 부어 주시는 걸 직접 목격합니다. 그제야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남아 있던 편견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Ⅲ. 깨달았나이다. 34-35
여기 베드로의 고백을 보십시오. 34-35절에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여기 “깨달았다”는 이 단어는 흔히 그냥 “알았다” 수준이 아니라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꽉 붙들고 놓치지 않을 정도로 이해했다”
베드로도 처음엔 철저히 유대인 중심의 관점으로 세상을 봤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이 그를 완전히 바꿔놓았어요. 그 깨달음은 어디서 왔습니까? 베드로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했어요. 하나님이 직접 환상을 보여주시고, 구체적인 상황으로 인도하시고, 성령의 임재라는 확실한 증거까지 주셨을 때, 비로소 베드로 마음 깊은 곳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사건은 초대교회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도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성령이 임하는구나” 하는 사실이 알려지자, 복음이 본격적으로 온 세상으로 뻗어나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먼저 ‘혹시 내 안에 있는 선입견은 무엇일까?’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가령 내가 미워하는 특정 집단, 혹은 ‘저 사람은 나와 너무 달라서 안 맞아’라고 미리 결론 내려버린 사람은 없습니까? 내 안의 그 선입견 때문에 복음이 전해져야 할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거나, 그를 환대하지 못하고 있진 않습니까?
여러분, 교회란 곳은 원래 “편견을 깨트리는 곳”입니다. 누구라도 올 수 있고, 누구라도 환영받고, 누구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교회라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내가 편해 보이는 사람과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낯선 사람, 보기에 좀 부담스럽거나 불편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다가가 안부를 묻고, 식탁을 나누고, 기도 제목을 교환하고… 이런 작은 모습들에서부터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찾아간 사건 같은 역사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베드로가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면 다 받으신다”라고 고백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편견을 벗어던지길 소망합니다. 그 일이 사람의 의지나 열심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함을 꼭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 은혜에 응답하여 한 걸음씩 순종할 때, 우리 삶 속에서도 놀라운 변화와 만남, 복음의 확장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환상 보고도 “저건 사탄의 미혹이야” 하면서 안 따라갔다면, 교회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편견의 벽이 무너지자 이방 선교의 물꼬가 터진 것입니다. 바로 이 교두보를 발판으로 누가 나옵니까? 바울이 온 땅 에 복음 증거지로 세워지게 됩니다.
이제 이방인 고넬료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항상 기도에 힘을 쓰소 구제의 힘을 썼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고급 장교로 얼마든지 자신의 권력으로 마음껏 착취하는 자리에 설 수도 있었지만, 그는 정말 겸손한 사람입니다. 2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고넬료는 지배국 로마의 장교입니다.
그리고 고넬료의 집에 초청받아 온 베드로는 피지배국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하층민인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신분상으로 보면 고넬료와 베드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있다는 생각으로 베드로의 발아래 엎드려 절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고넬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존경받을만한 인품이나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귀하게 여길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말씀 듣는 태도는 겸손입니다. 말씀 전하는 사람 앞에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겸손한 마음일 때 바로 그 마음에 폭포수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그런 자세로 말씀을 들으니까, 오늘 본문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고넬료는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고넬료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바르게 들으면 성령의 임재와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들을 때 우리의 삶에 가로막혀 있는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말씀을 잘 들을 때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고넬료가 성령 받고 은혜 받고 나니까 유대땅에만 머물던 복음이 이방 세계인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거 되지 않습니까? 고넬료는 사도행전의 물꼬를 여는 교두보입니다. 베드로가 이방 선교의 교두보로 서게 되었을 때, 그 교두보를 통해 사도 바울이 담대하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우리 동성 교회가 이 시대의 교두보로 세워지길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한 토대 마련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말씀, 예배 등 기초를 든든히 다지는 것이 ‘교두보’를 마련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말씀과 기도로 스스로를 단단히 세워두면, 어려움이 닥칠 때 흔들리지 않을 발판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확장과 성장을 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교두보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신앙 역시 오늘 은혜받았다고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계속 성장하고 확장해야 합니다. 작은 헌신과 실천부터 시작해서 점차 더 큰 사역, 섬김, 전도 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교두보를 넓혀가는 모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교두보가 무너지지 않도록 항상 보수하고 방어하듯, 우리의 신앙생활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약화된 부분을 보강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 신앙의 터전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본문을 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건의 각 장면을 연결해 볼 때 고넬료에게서 베드로로, 베드로에게서 고넬료로 모든 시간이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습니다. 시간을 맞추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연극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인생의 무대 뒤편에서 우리의 삶을 연출하고 계십니다.
어쨌든 우리는 현재의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말고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치고 더 넓은 비전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더 큰 비전을 소유하여야 합니다. 비전의 변화가 사람의 변화를 부릅니다. 그리고 절대로 남에게 편견을 갖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아들이신 형제를 당신이 무엇인데 못 받아들인단 말입니까? 우리 교회도 더 넓은 비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양으로 말하면 적은 믿음에서 큰 믿음으로 가야 하고, 영역으로 말하면 좁은 믿음에서 "넓은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 은혜가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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