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툼이 일어날 때 행15:36-41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행복을 좌우하는 요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요소가 있다면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고 환경이 어려워도 관계가 좋으면 우리는 어떤 문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좋은 상황에 놓여 있어도 이 관계가 힘들면 그 삶은 지옥과 같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과도 어려운 관계에 놓이지 않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사실 그러한 삶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나의 연약함 때문에 관계가 깨질 때도 있고 또 아무리 노력을 해도 상대방이 나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면 정말 관계가 회복되기 어렵습니다.
인간(人間)이라는 말의 한자의 뜻을 풀이해 보면 '사람 사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치는 이 관계의 갈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합니다. 또 한번 꼬이게 되면 그것을 극복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모두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은 참 훌륭한 목회자였던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서로 갈라섰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에 평안이 깨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사건을 기록하셨어야만 했을까요? 하나님은 이들이 잘한 장점을 우리가 배우기를 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실수를 통해 주시는 성령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숨어 떨고 지내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이야기한 첫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맛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화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불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이 갈등을 넘어 어떻게 화목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Ⅰ.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이유는 굉장히 간단합니다. 교리적인 문제도 아니고 ‘마가를 데려갈 것인가 말 것인가?’였습니다. 37절에 보면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이 ‘가고자 하나’를 우리말은 보통 시제로 쓰였지만, 헬라어에서는 미완료 시제를 썼습니다. 이 말은 고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한번만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한 것이 아니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야 한다고 계속 고집을 하는 것입니다. 왜 고집합니까? 바나바를 잘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에게는 참으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가가 어떤 사람입니까? 행13:13절을 보니 마가가 교회 역사 최초의 선교 여행을 포기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가는 갑자기 선교 여행을 중도에 포기하고 버가라는 곳에서 돌아가 버렸습니다. 마치 군대에서 작전 수행을 포기하고 탈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마가의 이 어리석은 결정은 그 당시 교회 지도자였던 바울에게 큰 실망을 주었습니다.
사실 마가의 이런 행동은 지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을때에도 중도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적이 있었습니다. 막14:50-52절에 보면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여기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친’ 사람이 마가입니다. 이처럼 마가는 중도에 관두고 포기하는데 전문가였던 것입니다. 지구력도 없고 끈기도 없습니다.
이번 일본 선교 대회 때 지바현 청소년 수련원에 온 70여명의 선교사 부부들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혼을 결심한 가정, 사모가 우울증으로 타문화권에 적응을 못하고 사는 그런 영적으로 무너져 가는 가정이 한둘이 아닙니다. 평생을 말씀을 전해도 변변한 열매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여지면, 자신감도 없어지고, 그냥 주저앉고 싶지 않겠습니까? 저는 일본에 머물면서 마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가 역시 자신이 자신을 생각해보아도 정말 구제불능의 모습으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모습이 반복 되다보면 자신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열등감이 그리고 죄책감마져 그 마음에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바나바가 그것을 안 것입니다. ‘마가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역에서 떠날지도 모른다. 마가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야. 그가 비록 몇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함께 해야 한다는 이 마음이 바나바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중요시하는 관계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습니까? 38절에 “바울이 밤빌리아에서 자기를 떠나 한 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이 구절 역시 미완료 시제입니다. 안된다고 그냥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못 데리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너무 가혹한 사람입니까? 역시 아닙니다. 지금 바울의 입장은 자신들의 선교는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만약 사람의 일 같으면 마가를 얼마든지 데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차대한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전혀 안 되는 사람과 함께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를 한 것입니다. 이 문제로 이들은 심히 다투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 ‘심히 다투었다’는 이 말은 그냥 말다툼 정도가 아닙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이건 감정이 폭발할 때, 격렬하게 충돌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칼끝이 서로 부딪히는 것처럼 날카롭고, 피할 수 없는 충돌이 일어난 것입니다. 평생을 함께 사역을 위해 살아갈 것 같은 사도가 심히 다투다가 결국 갈라서고 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여러분은 다툼이 있습니까? 왜 머리가 터지도록 싸웁니까? 예외가 없습니다. 자기라는 시야를 가지고 상대를 보기 때문에 상대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서고 심지어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수많은 다툼이, 얼마나 수많은 가정불화가 이 좁은 시야에서 비롯되는지 모릅니다. 불화하지 아니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시야를 넓히십시오. 나의 생각으로만 문제를 보지 말고 나의 눈으로만, 사물을 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사물을 보기 위해 노력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기도와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Ⅱ. 양보와 섬김의 자세로
자!! 이 성령 충만한 두 사도의 싸움에서 우리는 또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타협점을 찾아야 합니다. 양보와 섬김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엔 죄를 범한 인간은 항상 갈등과 분열의 역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절대 놓쳐선 안 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사탄은 언제나 다툼을 통해 교회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다툼이 언제나 사탄의 역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탄은 다툼을 틈타 역사합니다.
여러분, 사탄은 교회를 밖에서 무너뜨리는 것보다 안에서 갈라지게 하는 것을 더 좋아해요. 왜냐하면 복음을 가진 자들이 싸우면, 복음은 멈추거든요. 엡4:26-27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마귀는 언제 틈을 탈까요? 우리가 분을 품고, 오해하고,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할 때, 그 틈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나는 옳아!’ 하는 마음이 깊어질 때, ‘저 사람만 아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될 때, 대화는 끊어지고, 마음은 닫히고, 결국 공동체 안에 벽이 세워질 때, 그 틈은 사탄의 놀이터가 됩니다. 사탄은 관계를 무너뜨려 복음을 막습니다. 사탄은 무엇보다도 복음을 방해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관계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정에 사로잡히고, 다툼에 매이게 되면 복음은 멈추고, 교회는 약해지고, 세상은 외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툼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분별입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단지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지금 이 상황에서 사탄이 틈타지 않도록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약3:14-16도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이 말씀은 무서운 진리를 알려줍니다. 시기와 다툼은 하늘의 지혜가 아니라, 오히려 ‘귀신의 것’이라는 겁니다. 다툼이 계속되면 그 안에 하나님의 역사는 점점 사라지고, 혼란과 악한 일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여러분, 이게 사탄의 전략입니다. 시기와 다툼을 심고, 공동체를 혼란하게 만들고, 악한 일들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겐 영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다툼 뒤에 사탄이 역사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내 감정은 성령이 주신 것일까, 아니면 마귀가 틈탄 것일까?’ 그걸 기도로 분별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안에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툼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우리의 영적 민감도에 달려 있습니다. 사탄은 다툼 속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 감정을 붙잡고 미움과 오해로 몰고 갑니다. 그리고 결국 복음을 잃게 만들지 않습니까? 혹시 지금 누군가와 갈등 중이신가요? 말은 안 하지만 마음의 벽이 생긴 분이 있나요?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이 다툼 속에 숨어 있는 사탄의 역사를 꿰뚫어 보게 하시고, 복음으로 이기게 하소서.’ 그리고 복음 앞에서 다시 손을 잡으십시오. 하나님은 그 다툼조차 사용하셔서 더 넓은 복음의 길을 여실 것입니다. 복음은 다툼보다 크고, 복음은 회복을 이루는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Ⅲ. 갈등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39-40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여기 ‘피차 갈라서니’ 이 두 위대한 사도는 불행하게도 진리도 아니요, 교리도 아닌 일에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피차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평생 합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바나바의 이름은 사도행전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견해 차이 때문입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해서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주위에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조금만 타협하면 되는데, 조금만 양보하면 되는데 자존심을 내세우고 고집을 피웁니다. 그래서 가정과 단체가 송두리째 불화속으로 빠져듭니다. 진리는 목숨을 걸고 지키십시오. 그러나 진리가 아닌 모든 일에는 여러분의 의견을 조금씩 양보해서 상대와 타협점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참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흑과 백이 참으로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말씀을 읽는 동안 이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알았습니다. 이러한 나의 태도로 인해서 내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을까? 나는 의인인 줄 착각하고 있는 동안에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이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동안 진리가 아닌 모든 일에, 반드시 타협점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거기에 화목이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한 몸에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불화를 피할 수 있을까? 우리의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모든 일에 타협점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참 부끄러운 사건입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새 시대를 향하는 일에 핵심적인 인물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결코 미화하지 않습니다. 목동 출신인 다윗을 향해 하나님은 저가 나의 마음에 합한 자라 칭찬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부름을 입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나아가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선한 왕이었습니다.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실수를 남김없이 기록합니다. 그는 음욕에 빠져 간음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부하를 살인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성경이 그 사건을 얼마나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던가요?
우리가 알 듯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완벽한 제자였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제가 죽는데까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동시에 "사단아!" 하는 말씀까지 들었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에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성경이 그 사건을 얼마나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해서일까요? 하나님은 그들의 실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겉모양만 봐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있는지,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담겨있는지, 뭐 사람의 겉모습만 봐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잖아요. 누구나 앞문을 굳게 닫고 오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모습뿐이지, 여러분의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안고 있는 삶의 특별한 아픔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누구나 십자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고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인해 염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불안한 우리의 미래를 앞에 놓고 두려움에 갇혀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각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 없이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 각자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십니다. 그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거기서 자신에게 침뱉고 판단하고 비난한 사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진리를 아십니까? 때로는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과 씨름하며 사랑을 배우게 하십니다, 슬픔의 파도 속에서 슬픔을 넘어서는 기쁨을 배우게도 하시고, 때로는 불화의 딜레마 속에서 화평의 진리를 배우게 하시고, 때로는 견디기 힘든 환경에서 오래 참는 인격을 연단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억지로 손해 보는 경험을 통해 관용을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온 결과물로서 업적이 아닌 우리가 빚어 온 인격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가 얼마나 거창한 일을 하느냐”가 아닙니다. 날마다 부딪치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 인격으로 빚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리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같은 것을 만세전에 아시고 끝까지 간섭을 하시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대신 나를 끌어 안으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계획 앞에서 나를 보면 나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이곳, 하나님의 교회에서 여러분을 지체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가며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제 좀더 성숙해 지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다투지 마세요. 배려와 사랑으로 섬기십시오.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나아가십시요!! 내 삶을 내어드릴 때, 성령께서 도우시고 내 성품을 날마다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로 삼아 새 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아름답게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일에 내가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시고 찬양하십시오.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함께 하심으로 승리를 경험케 하는 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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