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2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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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4-27본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8. 2025. 4/27
얼마 전에 우리나라 천재 기사라고 알려진 이세돌과 알파고라는 인공지능 AI와 바둑을 둔다는 기사를 통해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15년전에도 이세돌과 인공지능인 알파고와의 대전에서 1패 4승으로 이세돌이 한번 이긴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 대결리 엄청난 뉴스였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바둑을 좋아하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프로 바둑 기사가 바둑 한판을 두는데는 보통 400여 수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프로 기사들은 바둑이 끝나고 나서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복기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의 두뇌가 뛰어난데다가 강훈련을 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프로가 아니더래도 이것은 가능합니다. 저도 바둑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 바둑을 잘 두시는 분에게 어떻게 복기가 가능한가를 물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프로 기사들은 의미 없는 돌을 놓지 않습니다. 의미 있는 돌만을 놓기 때문에 그 의미를 따라가면 복기가 가능하지요”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30년을 살았습니까? 50년, 혹은 그 이상을 살아 오셨습니까? 가운데 몇 수까지를 복기할 수가 있습니까? 만약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게, 복기할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살았다면 내 인생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부터는 의미 있는 돌을 놓아야 합니다. 자! 어디서 첫 사랑을 잃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아마 다 첫 사랑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부부생활, 지금도 그 사랑의 힘 때문에 정말 윤기 나는 삶을 살아가나요? 아니면 이미 마지못해 살아가는 그런 사이는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7명이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첫사랑이 어려 있는 곳입니다. 열한 제자는 모두 이곳 갈릴리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게 해 주신 곳도 갈릴리입니다. 주님은 바다의 풍랑 위를 걸으셨고 풍랑을 잔잔케 한 현장도 갈릴리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곳도 갈릴리 벳세다 들판입니다. 이제 그 주님은 이제 부활하셔서 이 갈릴리에서 제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인에게 있어서 ‘첫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가슴 가득히 밀려온 감격과, 주님을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렸던 황홀할 정도로 감사했던 마음, 주님이 말씀하시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섬겼던 뜨거운 열정을 만들어냈던 감격을 가진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렇게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무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 모습을 보고 하나같이 무너지기 시작을 합니다. 그들이 가졌던 꿈도 희망도 잃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힘이 들어도 이 첫사랑을 잃으면 결국 영적 방황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어두움의 세력에 빠져 더 비참한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갈릴리에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갈릴리 출신’이라는 말은 ‘버림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이들에게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으셨습니까? 할만큼 했지 않습니까? 이제 가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예 새판을 짜서 새롭게 얼마든지 부활하신 주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제자를 세워 하실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널부러져 있는 당신의 제자들을 일으키기 위해 이 갈릴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부활의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갈릴리까지 온 제자 가운데 베드로가 3절에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가노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에 6명의 제자도 함께 따라나섭니다. 이 장면은 부활의 능력을 의심하고 지난날 자기들이 버렸던 옛 직업인 고기잡이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러나 한밤을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한 실패의 현장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빈 배에 가득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잡은 고기를 요리해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새벽이 동터오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친히 준비해 주신 조반을 소리 없이 나누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들리는 것이라곤 바닷가에서 부서지는 파도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뿐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실패의 자리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같으면 자기를 배신하고 옛날 직업으로 돌아간 이들 앞에 무슨 이야기가 먼저 나오겠습니까? 내가 지난 3년 동안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먹여 주고 입혀 주었으며, 나의 마지막 진액이 다하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던 나의 제자들이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했습니다. 공개석상에서 나를 욕하고 저주하면서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신이 내게 안겨 준 것은 처참하면서도 고독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배신자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배신자들이 내 앞에 앉아 있습니다. 누구 한 사람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내 입에서 과연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하며 귀를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라면, 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후회할 망정 일단 배신자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부터 휘두르고 볼 것입니다.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상기시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나를 배신했는지 그 이유를 따지려 들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지나간 과거는 모두 불문에 붙인 채 다시는 인간답잖게 배신자가 되지 말 것을 점잖게 그러나 따끔하게 훈계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우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들에게 보복을 가하시거나 배신의 원인을 규명하시려거나 훈계하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에게 단지 이렇게 물으셨을 뿐입니다.
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먹으로 때린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를 따지거나 훈계를 한다고 해서 다시 배신치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한번 배신한 사람은 기회만 닿으면 몇 번이고 다시 배신하는 법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했던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살펴보면 ‘네가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은 함께한 다른 6명의 제자들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침내 침묵을 깨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15절 하반절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였다'고 과거형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주를 사랑하고 있다'고 현재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주님보다 허망한 갈릴리 바다를 더 귀하게 여겼었기 때문입니다. 곧 썩어질 생선에, 덧없는 세상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도 주님도 망각한 채 밤이 맞도록 헛그물질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내가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노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를 실패의 자리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배신한 적이 있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잠시 환경과 현실 앞에 무력해 진 자신이지만, 그의 영혼 깊은 곳엔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식어진 영혼을 적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사랑’이라고 다 똑같이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단어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하는냐를 세 번 물어 보셨습니다. 이 처음과 두 번째 쓰신 ‘사랑하느냐’는 ἀγαπᾷς (아가파오)입니다. 이건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φιλῶ (필레오) 로 대답합니다. 이건 ‘형제처럼 우정으로 사랑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네가 나를 전심으로, 모든 걸 다해서 사랑하느냐?”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주님, 제가 인간적으로 정말 좋아하고 소중히 여깁니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베드로는 자신 있게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국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 기억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는 겁니다. 그래서 더이상 “내가 주님을 완전하게 사랑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겸손해졌습니다. 상한 심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 세 번째에는 “네가 나를 φιλῶ 하느냐?” 주님이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 네가 지금 줄 수 있는 만큼의 사랑, 그것도 내가 받겠다.” 그게 은혜 아닙니까?
Ⅱ. 사랑의 고백 이후 주신 사명 양을 먹이라, 치라(15-17)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을 들으신 후 곧바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사랑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섬김과 돌봄으로 드러나야 함을 보여줍니다. 여기 베드로가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때마다 양을 먹이라, 양을 치라 양을 먹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들을 양육하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공급을 책임지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단지 말씀을 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보살피고, 보호하며, 인도하는 사역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세 번 사명을 재확인시킴으로써 회복과 동시에 다시 제자의 길로 부르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양을 돌보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도전입니다. 목회자, 교사, 리더 모두가 이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의 가져야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에게 맡기신 영혼들을 돌아보고, 말씀을 나누고, 기도로 세워야 합니다.
Ⅲ. 마지막까지 가야 할 길 (18-19)
여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18-19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너를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여기서 ‘원하지 않는 곳’이란 바로 십자가의 길, 순교의 길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예언이 아닙니다. 사명자로서의 길, 따라야 할 제자의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자기 의지보다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후에 로마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는데, 예수님과 똑같이 달릴 자격이 없다고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랑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의 고백은 진짜냐? 그렇다면 너의 남은 인생은 나를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너의 끝도 나를 따라야 한다." 베드로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이 사명이 되고, 그 사명은 고난의 길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 청년 여름 수련회때 나가사끼를 갑니다. 일본의 순교지입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순교한 현장이니다. 그 가운데 엔도 슈사크가 쓴 ‘침묵’의 배경이 바로 이 현장입니다. 일본의 막부가 기독교를 박해할 때 기독교인을 색출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후미에’라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린 초상’을 밟게 한 것입니다. 저들이 모든 나가사끼 사람들에게 후미에를 밟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차마 이 후미에를 밟지 못하다 끌려가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씨를 말리겠다는 생각으로 매년 한 차례씩 후미에를 밟게 했다는 것입니다. 숨어있던 기독교인들이 결국이 후미에를 밟지 못하고 끌려가서 순교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후미에를 밟지 못했을까요? 후미에를 밟지 않으면 끌려가 죽는 것을 알면서도 왜 밟지 못했을까요?
사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후미에를 밟으며 박해를 피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으로 구차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기독교인들은 성숙한 믿음으로 후미에를 밟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끌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시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죽는 줄 알면서도 후미에를 밟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과연 이런 박해를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참으로 혼란스럽고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치는 불안하고, 경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교회조차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너질 때가 많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려 해도, 세상의 흐름은 우리를 끊임없이 낙심하게 만들고, 신앙을 지키는 것조차 어리석어 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58절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요즘처럼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에, 믿음은 더욱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를 붙드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주님이십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상황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이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요즘은 힘을 빼는 시대입니다. “이 정도만 하지 뭐”, “괜히 열심 내다가 손해 본다”는 생각이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더욱 힘쓰라고요. 주님의 일이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결과가 없을지라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기억하시고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왜입니까?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여러분, 주 안에서 행한 기도, 눈물, 헌신, 섬김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기억하시고, 때가 되면 열매 맺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흔들어도, 믿음 위에 굳건히 서십시오. 상황이 낙심하게 해도, 주님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위해 다시 힘을 내십시오. 우리는 오늘도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 사랑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여전히 이어집니다. “나를 따르라.” 이 부르심에, 우리가 진심으로 대답하며 따르기를 축원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천재 기사라고 알려진 이세돌과 알파고라는 인공지능 AI와 바둑을 둔다는 기사를 통해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15년전에도 이세돌과 인공지능인 알파고와의 대전에서 1패 4승으로 이세돌이 한번 이긴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 대결리 엄청난 뉴스였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바둑을 좋아하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프로 바둑 기사가 바둑 한판을 두는데는 보통 400여 수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프로 기사들은 바둑이 끝나고 나서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복기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의 두뇌가 뛰어난데다가 강훈련을 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프로가 아니더래도 이것은 가능합니다. 저도 바둑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 바둑을 잘 두시는 분에게 어떻게 복기가 가능한가를 물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프로 기사들은 의미 없는 돌을 놓지 않습니다. 의미 있는 돌만을 놓기 때문에 그 의미를 따라가면 복기가 가능하지요”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30년을 살았습니까? 50년, 혹은 그 이상을 살아 오셨습니까? 가운데 몇 수까지를 복기할 수가 있습니까? 만약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게, 복기할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살았다면 내 인생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부터는 의미 있는 돌을 놓아야 합니다. 자! 어디서 첫 사랑을 잃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아마 다 첫 사랑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부부생활, 지금도 그 사랑의 힘 때문에 정말 윤기 나는 삶을 살아가나요? 아니면 이미 마지못해 살아가는 그런 사이는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7명이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첫사랑이 어려 있는 곳입니다. 열한 제자는 모두 이곳 갈릴리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게 해 주신 곳도 갈릴리입니다. 주님은 바다의 풍랑 위를 걸으셨고 풍랑을 잔잔케 한 현장도 갈릴리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곳도 갈릴리 벳세다 들판입니다. 이제 그 주님은 이제 부활하셔서 이 갈릴리에서 제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인에게 있어서 ‘첫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가슴 가득히 밀려온 감격과, 주님을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렸던 황홀할 정도로 감사했던 마음, 주님이 말씀하시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섬겼던 뜨거운 열정을 만들어냈던 감격을 가진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렇게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무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 모습을 보고 하나같이 무너지기 시작을 합니다. 그들이 가졌던 꿈도 희망도 잃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힘이 들어도 이 첫사랑을 잃으면 결국 영적 방황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어두움의 세력에 빠져 더 비참한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갈릴리에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갈릴리 출신’이라는 말은 ‘버림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이들에게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으셨습니까? 할만큼 했지 않습니까? 이제 가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예 새판을 짜서 새롭게 얼마든지 부활하신 주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제자를 세워 하실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널부러져 있는 당신의 제자들을 일으키기 위해 이 갈릴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부활의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갈릴리까지 온 제자 가운데 베드로가 3절에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가노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에 6명의 제자도 함께 따라나섭니다. 이 장면은 부활의 능력을 의심하고 지난날 자기들이 버렸던 옛 직업인 고기잡이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러나 한밤을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한 실패의 현장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빈 배에 가득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잡은 고기를 요리해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새벽이 동터오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친히 준비해 주신 조반을 소리 없이 나누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들리는 것이라곤 바닷가에서 부서지는 파도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뿐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실패의 자리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같으면 자기를 배신하고 옛날 직업으로 돌아간 이들 앞에 무슨 이야기가 먼저 나오겠습니까? 내가 지난 3년 동안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먹여 주고 입혀 주었으며, 나의 마지막 진액이 다하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던 나의 제자들이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했습니다. 공개석상에서 나를 욕하고 저주하면서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신이 내게 안겨 준 것은 처참하면서도 고독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배신자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배신자들이 내 앞에 앉아 있습니다. 누구 한 사람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내 입에서 과연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하며 귀를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라면, 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후회할 망정 일단 배신자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부터 휘두르고 볼 것입니다.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상기시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나를 배신했는지 그 이유를 따지려 들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지나간 과거는 모두 불문에 붙인 채 다시는 인간답잖게 배신자가 되지 말 것을 점잖게 그러나 따끔하게 훈계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우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들에게 보복을 가하시거나 배신의 원인을 규명하시려거나 훈계하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에게 단지 이렇게 물으셨을 뿐입니다.
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먹으로 때린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를 따지거나 훈계를 한다고 해서 다시 배신치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한번 배신한 사람은 기회만 닿으면 몇 번이고 다시 배신하는 법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했던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살펴보면 ‘네가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은 함께한 다른 6명의 제자들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침내 침묵을 깨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15절 하반절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였다'고 과거형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주를 사랑하고 있다'고 현재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주님보다 허망한 갈릴리 바다를 더 귀하게 여겼었기 때문입니다. 곧 썩어질 생선에, 덧없는 세상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도 주님도 망각한 채 밤이 맞도록 헛그물질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내가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노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를 실패의 자리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배신한 적이 있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잠시 환경과 현실 앞에 무력해 진 자신이지만, 그의 영혼 깊은 곳엔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식어진 영혼을 적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사랑’이라고 다 똑같이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단어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하는냐를 세 번 물어 보셨습니다. 이 처음과 두 번째 쓰신 ‘사랑하느냐’는 ἀγαπᾷς (아가파오)입니다. 이건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φιλῶ (필레오) 로 대답합니다. 이건 ‘형제처럼 우정으로 사랑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네가 나를 전심으로, 모든 걸 다해서 사랑하느냐?”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주님, 제가 인간적으로 정말 좋아하고 소중히 여깁니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베드로는 자신 있게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국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 기억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는 겁니다. 그래서 더이상 “내가 주님을 완전하게 사랑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겸손해졌습니다. 상한 심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 세 번째에는 “네가 나를 φιλῶ 하느냐?” 주님이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 네가 지금 줄 수 있는 만큼의 사랑, 그것도 내가 받겠다.” 그게 은혜 아닙니까?
Ⅱ. 사랑의 고백 이후 주신 사명 양을 먹이라, 치라(15-17)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을 들으신 후 곧바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사랑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섬김과 돌봄으로 드러나야 함을 보여줍니다. 여기 베드로가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때마다 양을 먹이라, 양을 치라 양을 먹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들을 양육하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공급을 책임지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단지 말씀을 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보살피고, 보호하며, 인도하는 사역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세 번 사명을 재확인시킴으로써 회복과 동시에 다시 제자의 길로 부르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양을 돌보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도전입니다. 목회자, 교사, 리더 모두가 이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의 가져야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에게 맡기신 영혼들을 돌아보고, 말씀을 나누고, 기도로 세워야 합니다.
Ⅲ. 마지막까지 가야 할 길 (18-19)
여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18-19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너를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여기서 ‘원하지 않는 곳’이란 바로 십자가의 길, 순교의 길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예언이 아닙니다. 사명자로서의 길, 따라야 할 제자의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자기 의지보다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후에 로마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는데, 예수님과 똑같이 달릴 자격이 없다고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랑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의 고백은 진짜냐? 그렇다면 너의 남은 인생은 나를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너의 끝도 나를 따라야 한다." 베드로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이 사명이 되고, 그 사명은 고난의 길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 청년 여름 수련회때 나가사끼를 갑니다. 일본의 순교지입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순교한 현장이니다. 그 가운데 엔도 슈사크가 쓴 ‘침묵’의 배경이 바로 이 현장입니다. 일본의 막부가 기독교를 박해할 때 기독교인을 색출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후미에’라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린 초상’을 밟게 한 것입니다. 저들이 모든 나가사끼 사람들에게 후미에를 밟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차마 이 후미에를 밟지 못하다 끌려가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씨를 말리겠다는 생각으로 매년 한 차례씩 후미에를 밟게 했다는 것입니다. 숨어있던 기독교인들이 결국이 후미에를 밟지 못하고 끌려가서 순교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후미에를 밟지 못했을까요? 후미에를 밟지 않으면 끌려가 죽는 것을 알면서도 왜 밟지 못했을까요?
사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후미에를 밟으며 박해를 피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으로 구차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기독교인들은 성숙한 믿음으로 후미에를 밟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끌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시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죽는 줄 알면서도 후미에를 밟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과연 이런 박해를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참으로 혼란스럽고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치는 불안하고, 경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교회조차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너질 때가 많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려 해도, 세상의 흐름은 우리를 끊임없이 낙심하게 만들고, 신앙을 지키는 것조차 어리석어 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58절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요즘처럼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에, 믿음은 더욱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를 붙드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주님이십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상황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이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요즘은 힘을 빼는 시대입니다. “이 정도만 하지 뭐”, “괜히 열심 내다가 손해 본다”는 생각이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더욱 힘쓰라고요. 주님의 일이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결과가 없을지라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기억하시고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왜입니까?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여러분, 주 안에서 행한 기도, 눈물, 헌신, 섬김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기억하시고, 때가 되면 열매 맺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흔들어도, 믿음 위에 굳건히 서십시오. 상황이 낙심하게 해도, 주님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위해 다시 힘을 내십시오. 우리는 오늘도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 사랑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여전히 이어집니다. “나를 따르라.” 이 부르심에, 우리가 진심으로 대답하며 따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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