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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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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 변화 된 사람들. ③ 행26:12-18. 2014년 6월 15일. 주일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6-15 | 조회: 1469
어제 우리 교회 김세영 형제의 결혼 주례를 서는 데 문자가 왔습니다. 제가 이번 학기에 강의를 맡은 반에 학생인데 이분은 원래 비행기 기장으로 일하던 분인데 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공부를 하는 분입니다. 그저 단순히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공부를 하시는 정도로만 생각을 했는데 메일을 보고 제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분이 항공기 기장으로 계실 때 2007년 2월초인데 병원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癌중의 암이라 하는 혈액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표현은 ‘하나님은 많은 세월을 지켜보시다 이제는 안 되겠다 싶으셔서 마지막으로 癌중의 암이라 하는 혈액암 先知者를 보내신 것’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자신의 나이 한창인 56세였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의사가 암이라는 것을 이야기 할 때, ‘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의사인 동생은 치료를 위한 의료절차로 분주했고 아내와 문병오신 목사님은 통곡했습니다. 통곡하시는 목사님을 향해 감사의 禮拜를 드려 달라 부탁을 드렸답니다. 왜 그런지 가슴에는 感謝와 찬양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느껴 감격한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며, 기다리고 계시다는 確信에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지금도 그 암과 싸움을 하면서 이제 학교를 마치게 되면, 네팔에 선교사로서 자신의 삶을 드린다는 각오의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간증(Testimony)’이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우리가 간증이란 말을 종종 듣는데, 간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간증이란 말은 원래 법정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법정에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진술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간증이란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일‘ 그러니까 간증이란 종교적 체험을 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그동안 체험했던 것을 소개함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챤들이 간증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주위에 보면 간증하기를 주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격상 수줍음을 잘 타서 남들 앞에서 말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가 경험하는 것을 드러내는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간증이란 아주 거창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증을 하라고 하면, “목사님, 제가 간증할 것이 있나요? 저는 간증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분들에게 도전을 줍니다. 지금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 피의자로 선 사도 바울이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자신이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삶을 묘사하는 대목과, 예수께서 자신을 만나서 주셨던 은혜를 묘사하는 대목, 그리고 은혜를 받고 난 이후 자신이 받은 사명을 따라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고백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동성 교회를 45년 전에 이 황무지와도 같은 허허벌판에 당신의 핏값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저는 “변화 된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은혜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은혜 받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란 종교적인 보수주의자들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특별한 열심을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하루에 세 번 정한 시간에 기도했으며, 일주일에 두 번 금식기도를 했으며, 십일조를 드렸으며, 집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붙여놓았습니다. 손목과 미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말아서 차고 다녔습니다.

또 죄인으로 여겼던 세리나 고리대금업자, 창기들과는 어울리지도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613가지의 세부규정을 만들어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바리새파 중에서도 바리새파라고 할 만큼 열성분자였습니다. 또 그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자기 의를 내세울 만 했으며 종교적 열심이 특별히 뛰어난 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의 눈으로 볼 때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는 참으로 용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자였습니다.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을 손바닥으로 비벼 먹는 것이나 병자를 고치는 일 따위는 안식일에 관한 규정을 어긴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율법 이해, 바울의 하나님 이해로는,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철저히 종교에 얽매이고 율법에 얽매인 뼈만 앙상한 종교주의자였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자신의 의를 내세웠지만, 그의 영혼 가운데는 평안도, 자유함도, 기쁨도, 사랑도 없이 메마름과 영적인 허무 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오기와 독선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만나기 전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예수를 만나기 이전 그러한 모습이 아니었던가요?



Ⅱ. 바울의 현재 : 주님의 음성을 들은 자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은혜 받기 이전의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밝힌 다음,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핍박자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여러분, 이때 주님의 음성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진노의 음성으로 들렸을까요? 아니면, 안타까움과 연민에 싸인 부드러운 목소리였을까요? 결코 진노의 목소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받은 은혜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 용납하시고 부드럽게 불러주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바울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자비로 불러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랑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우리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을 때도,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가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시고, 저와 여러분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불순종할 때도, 우리가 거역할 때도, 주님은 부르십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왜 그길로 가느냐? 그렇게 하면 너만 고생이다.” 이렇게 매일 부르시고 만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폭풍이 이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셔서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두려워 말라. 내니 안심하라.”고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의 바다에 역경이 닥쳐올 때,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분은 과연 듣고 계십니까? 오늘 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신앙생활을 오래하고도 우리 마음에 변화가 없습니까? 그 이유는 성경을 수없이 읽으면서도 이 애타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우리가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는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울을 찾으셨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의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내 머리 속의 하나님이 아닌, 성경 속에 기록된 제3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Ⅲ. 바울의 미래 : 은혜의 사명자마지막으로 바울이 받은 은혜는 무엇일까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먼저, 저는 “일어나 네 발로 서라.”는 말씀을 “일어나 돌아서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네가 지금까지 나를 핍박하고 대항하기 위해서 쫓아온 걸음이었지만 이제 일어나 돌아서라. 내가 너를 내 증인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종’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한 심부름꾼’이라는 의미보다는 ‘심복’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즉 가장 가까이에 두고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기겠다는 뜻입니다. 또 ‘증인’이라는 말도 단순히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순교자’라는 또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너는 이제까지는 핍박자였지만, 이제는 돌이켜 순교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명자로 세워주셨다는 은혜, 그것이 지금 바울로 하여금 죄인의 신분으로 심문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역시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각각에게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며 특권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사명을 받은 이후로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미래 역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바뀔 수 있습니까?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여기 은혜 받고 사명을 받은 자에게 변화될 수 밖에 없는 세 가지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두움이 빛으로 바뀝니다.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죄사함과 기업을 얻게 됩니다.

바울은 행 13장에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방인 선교에 나선 후 순교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선교여행에 헌신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약 2년 여 갈라디아 지역 224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는 약 3년 여 기간 동안 약 5000키로의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3차 전도 여행 때는 약 6년여 기간 동안 500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로마로 가서 긴 투옥생활을 보내고 잠시 풀려났습니다. 그 후 서바나와 기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로마에서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바울은 이 여행 도중 자기가 겪었던 그 고초를 고후 12:23절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를 맞습니다. 배신을 당합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5번이나 맞습니다. 돌로 맞고 태장으로 세 번 맞았습니다. 파선 당합니다. 굶주립니다. 핍박받습니다. 강도를 당하고 동족에게 배신당합니다. 그러나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다가와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소중한 구원의 즐거움, 자신에게 남겨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는 한 생을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으로 그 심령 깊은 곳에 은혜의 빛을 샘솟듯 쏟아내며 살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사람의 변화는 자기에게만 멈추지 않고 그를 만난 사람들에게도 놀라운 변화를 일으킵니다.

저는 처음 가장 엘리트로 살던 자기에게 다가온 암 중에서도 정멸 고약한 암인 혈액암이라는 판정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많은 세월을 지켜보시다 이제는 안 되겠다 싶으셔서 마지막으로 癌중의 암이라 하는 혈액암 先知者를 보내신 것’이라고 고백하며 이제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그 변화의 삶을 시작을 했습니다. - 자신의 남은 인생- 복음을 위해 살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오늘 바울을 보세요. 어떻게 이렇게 당당할 수가 있습니까?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계속 전하자 28절에서 아그립바 왕이 보여 준 반응을 주목해 보십시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 도다” 다시 말하면 짧은 시간에 몇 마디 네말로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회심시키려 하느냐? 라는 뜻이지요. 29절의 사도 바울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이 아니라 오늘 내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일하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얼마나 대담한 선포입니까? 이렇게 죄수로 결박되어 여러분 앞에 서 있는 모습 빼고는 나는 여러분이 나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평화를 당신들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내영혼 속에 넘치는 구원의 기쁨을 당신들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를 위해 예비 된 저 천국을 향한 그놀라운 내세의 희망을 당신들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오늘 여기서 내가 살아야 할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들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지금 이 순간도 내마음속에 살아계셔서 나를 인도하시는 내 삶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들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런 바울의 선언에 소위 당대의 권력자들이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행26:30-32을보십시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는 결박당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하지 않습니까? 32절에서는 아그립바 왕조차 바울이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만 안했더면 당장 석방시킴이 마땅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바울의 무죄함과 그의 삶의 순결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삶이 오히려 부러웠던 것입니다. 그는 분명 세상의 권력이 주지 못할 무엇인가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세상의 황금으로 살수 없는 어떤 내면의 행복을 가진 자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바울의 깊은 존재를 만나자 그들은 모두 갑자기 목마른 영혼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목마름은 바울이 만난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아니고는 결코 다른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소금 인형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소금 인형은 늘 목이 말랐습니다. 그의 목마름은 어떤 무엇으로도 해갈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큰 바다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마침내 바다에 도착하는 순간 너무 기뻐 그는 자기 발을 바다에 넣습니다. 바다는 자기 발을 짤라 가버립니다. 소금 인형은 아팠습니다. 다음 순간 바다는 다시 출렁거리며 다가와 그의 다리를 짤라 갑니다. 더 아팠습니다. 다음 순간 바다는 다시 출렁이며 그의 허리를 짤라 갔습니다.

더더 아팠습니다. 그러자 다음 순간 바다는 출렁이며 다가와 이번에는 그의 가슴을 짤라 갔습니다. 더, 더, 더, 아팠습니다. 다음 순간 바다는 다시 출렁이며 다가와 그의 목을 짤랐고 그의 목과 머리가 바다에 잠기는 순간 소금 인형은 기쁨에 찬외마디를 질러댑니다. “맞아. 내가 바다였지. 내가 바다야!“ 소금 인형이 그의 모태인 바다를 찾고 바다에 잠기는 순간 그는 비로소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 바다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이 바다가 우리를 받아 주시고 품어 주시고 우리 죄를 씻어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라고 전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변화 된 인생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 변화 된 한사람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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