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을찌라도의 감사 합3:16-19. "맥추감사주일" 2014년 7월6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7-06 |
조회: 1494
얼마 전에 남편이 실직 상태에서 견디다 못해 아홉 살, 네 살, 5개월짜리 세 아들과 전업주부 아내를 두고 집 뒷산에 올라가 목을 메달아 지난 달에 자살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단란한 가정에 먹구름이 낀 것은 5년전에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아내와 살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고, 부부가 맞벌이를 하면서 집도 하나 장만을 할 수가 있었는데 아내가 둘째를 입신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를 임신하자 당시 월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슈퍼마켓 납품업을 시작했고 그럭저럭 유지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계 금융위기에 그대로 주저 앉은 것입니다.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백방으로 돈을 빌려 부도는 막았지만 상황은 계속 악화됐었고 심지어 가스· 전기료도 수 십 만원 연체됐다. 여기저기서 빚 독촉장이 날아들었습니다. 불어난 빚을 감당하기 어려운 때 급기야 아파트 압류 통지서가 배달됐었습니다. 고민하던 남편은 가족을 뒤로하고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이 가정 뿐만이 아니라는데 우리의 아픔이 있습니다. 요즘 세월호의 후유증은 정말 심각합니다. 소비 위축과 경기의 침체가 맛물리면서 우리 주변에 너무 쉽게 절망을 극복치 못한 채, 목숨을 끊는 일이 점점 많아집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자살률이 1위랍니다. 정말 마음이 찹찹하기 짝이 없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유명한 책을 남겼습니다. 그는 "진정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상실"이라 말합니다. 그는 이런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고 보았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요? 돈을 잃었거나 명예를 잃어서가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절망, 즉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사라질 때 인간은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미래를 희망 가운데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원치 않는 순간에 다가오는 인생의 위기로 인해 우리의 희망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상황이나 환경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인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은 우리 자신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희망은 바로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류의 희망은 결코 사람의 미래에게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지치고 곤고하십니까? "나는 안 돼, 할 수 없어, 나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아" 이렇게 고민하며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빛이 없는 캄캄한 밤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고독과 절망 속에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바로 그 절망의 자리, 고통의 자리에 다가오셔서 새로운 희망의 빛을 보여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절망의 땅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절망의 땅에서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희망의 노래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에게 감사하는 삶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이란 뜻은 "포옹한다. 껴안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시대의 고통을 끌어안고 살았던 사람, 고통 한복판에 서서 그 고통을 붙들고 몸부림하며 기도했던 사람, 그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대안과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제시했던 사람. 그리고 거기서 전능한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하박국입니다.
여러분, 사실 하박국은 처음부터 감사하며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하박국의 서두는 원망과 불평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 내가 이처럼 부르짖어도 왜 듣지 않으십니까? 왜 나를 강포로부터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왜 악인을 방치하여 정의가 실종되게 하십니까? 이처럼 처음에는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찼던 하박국이 끝부분에서는 찬양의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처음에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가득 찼던 하박국이 이제는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낮은 곳에서 기는 것 같은 부끄러운 모습을 벗어버리고 사슴처럼 높은 곳으로 뛰어다니는 당당함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바로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감사의 힘은 우리로 아름답게 변화시켜 줍니다. 감사의 힘은 우리로 높은 곳을 뛰어다니게끔 끌어 올려줍니다. 감사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뀌게 만들어줍니다. 나는 오늘 맥추 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여러분을 감사에로의 초대를 하고 싶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여기 보면 부정어가 6번( 못하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반복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3대 과실수가 무화과, 포도, 감람(올리브) 입니다. 과수원마다 애써서 지은 농사가 안됩니다. 밭도 마찬가지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다 짓밟혀버립니다. 이젠 어디를 찾아보아도 먹을 게 없습니다. 사람 먹을 것도 모자라니 가축들이 죽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인간 조건으로 보면 완전 절망입니다. 끝장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감사할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불안해하는 게 정상입니다. 감사의 이유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죠. 건강하던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부요하던 사람이 물질을 잃어버렸습니다. 권세와 지위가 있던 사람이 추락해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박국은 ‘없음’의 소유에서부터 일어섭니다. “이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고 그는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이처럼 두려움에서 일어나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다.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의 말씀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정신병자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앞뒤가 안 맞잖습니까? 상식적으로 기뻐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 감사하다니요.
사람이 환경이나 사물을 볼 때 몇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환경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 마음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았습니다. 환경의 관점으로 보면 정말 엉망인 상황입니다. 자기 마음의 관점으로 봐도 비참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만 감사가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은 많지만 18절을 보세요.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이 짧은 구절에 하나님을 두 가지로 표시합니다.?여호와??구원의 하나님?‘여호와’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한번도 택한 자녀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최악의 것을 최상의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그로 하여금 두려움에서 절망의 골짜기에서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적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 그리고 모든 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그는 확신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때로 내게 부딪힌 어려움, 고난, 이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만 아닙니다. 때때로 고난은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영원한 축복에 이르게 됩니다.
찌라도의 신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찌라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비록’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이 ‘없을찌라도’로 끝나는 신앙은 줄여서 ‘찌라도’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하박국 선지자 외에도 ‘찌라도’의 신앙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먼저 다니엘 3장을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나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세워놓고 모든 백성에게 절하라고 했습니다.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죽이겠다고 하여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느브갓네살 왕이 질문했습니다.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단 3:15). 너희 하나님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건져낼 능력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 사람이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풀무불에서도 얼마든지 건져낼 능력이 있지만 설사 그런 기적을 베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결단코 우상숭배는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찌라도’의 신앙입니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다윗의 신앙도 동일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다윗의 인생도 참 험합니다. 사울의 핍박. 압살롬의 반역... - 이것을 그는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찌라도로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두려움과 좌절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몸에 괴롭히는 육체가시가 있었습니다.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질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 번씩이나 그것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럴지라도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임을 깨닫고 만족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내가 약해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에 약하게 만드셨다는 응답을 받고 바울은 만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시대가 어려울수록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삶의 정황이 좋아진 다음에 하는 감사가 아니고 고통 한가운데 서서 고통을 바라보면서 다시 고통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는 감사가 진실한 감사입니다. 행복은 좋은 환경이 아니라 감사를 발견하는 것,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윌리암 로우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오늘 본문을 해석하며 그렇게 얘기합니다. "최고의 승자는 자선을 많이 베푼 사람이 아니다. 최고의 승자는 금식을 오랫동안 한 사람도 아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며 살았던 사람이 최고의 승자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어디까지 갈 때까지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의 수준일 수 있습니다. 얼마만큼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은혜의 수준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다 얻고도 불평하며 불행해 하는 사람이 있고 세상을 다 잃고도 하나님 한분으로 감사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하십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겁니다. ‘가시고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했던 ?내일?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오늘의 일상이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별 게 아니고, 남보다 못한 것 같아도, 때로는 짜증이 나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사는 것 자체가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때로는 힘들고 짜증이 나도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바꿔도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제 19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은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여기 사슴 하면 그 뿔과 날렵한 다리가 생각납니다. 사슴은 투명한 눈동자로 위험을 감지합니다. 골짜기에서 위험을 느낀 사슴은 그 즉시 날렵한 다리로 고지를 향해 춤추며 오르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골짜기에 서있던 사슴을 어느새 저 높은 고원의 언덕에 서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골짜기를 굽어봅니다. 그 날렵한 사슴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 놓은 곳에 있는 사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그렇게 인도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방금 전까지 우리는 어두움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괴로워하며 고통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절망하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사슴의 발같이 내 발을 들어올려 그 위험을 피하게 하시고 드디어 저 놓은 언덕, 나의 높은 곳, 가능성의 고지에 서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위기가 닥쳐올 때 사람들은 다 큰일났다,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담대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겉에 보이는 모든 조건들은 다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기쁨과 감사, 그리고 찬양의 조건이 된다면 언젠가는 실망하고 기쁨도 감사도 찬양도 다 상실하고 말 겁니다. 행복하지도 못할 겁니다. 고전 7:31 보면 바울 사도가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passing away) 벧전1:24 보면 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뉴욕의 9.11 테러 현장 - 거대한 세계무역센타 빌딩이 무너져 사라졌는데 그 자리를 가리켜 Ground Zero 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모든 조건이 이와 같이 사라져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라지지 않고 변치 않는 것을 기쁨과 감사의 이유로 삼아야 합니다. 변치 않고 영원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어느 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고 의지하는 신앙이 ‘재산목록 1호’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 우리 자신을 곰곰이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기뻐하며 무엇 때문에 고민하며 살아왔는지 ...! 이제는 하박국처럼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합2: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므로 어떤 형편에서든지, 설사 세상은 열두 번 변한다 해도 저와 여러분은 믿음을 변치 않고 이 고난의 현장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이 시간 기억하십시오. 모두가 답답한 현실이지만, 그 다음 우리가 내일을 바라 볼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 폭풍우와 비바람 건너편에 있는 내일 새벽에 비쳐질 그 영롱한 아름다운 빛살을 볼 수 있는 안목만 있다면,/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환경다음에 나를 만드시고 또 나를 붙들고,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그 분의 손길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벌떡 일어 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뻐하며 감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감사하는 삶을 잃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 한 번 더 하박국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한 감사자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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