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모처럼 인사동 거리를 교인들과 다녀 보았습니다. 교회 성도 한분의 작품 전시회가 유명 화랑에서 열린다는 것이 나에게 큰 관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음악인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낯설기도 했지만, 저 역시 그림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있습니다. 미술 전시회를 가보면, 우리는 정말 일상의 스쳐가는 것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작가의 시선을 통해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뭐, 우리가 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 예리한 통찰력과 집중이 아니면 그런 작품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은 오랫동안 작가의 시선이 머문 곳임을 알게 됩니다.
시선이 집중되는 곳, 우리는 그것을 관심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관심의 집중은 결국 나의 직업이 되고 삶이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따라 방향이 결정되지 않습니까?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건이 인생의 행로를 바꾸어 놓게 됩니다. 계속 시선을 모두고 거기에 관심을 두게 되면 그냥 보는 것과 시선을 집중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에서 한 인생이 자신의 삶을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아왔는가를 보게 됩니다. 먼저 본문의 2절 말씀을 보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매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 합니다.
그가 지금 구걸하기 위해 그의 시선이 한 일행에게 멈춥니다. 여기 3절에 보면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여기 ‘보고 구걸하거늘’이란 말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3-5절에, ‘본다’는 동사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그 동사는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진 동사들입니다. 먼저 3절에 보면 “(그 앉은뱅이 걸인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말은 별 의미 없이 보았다(see)는 뜻입니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기에, 그의 눈이 들어온 사람이기에 보였을 뿐입니다. 보고 싶어 본 것도 아니고, 관심이 있어 본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관심도 없습니다. 자기 앞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일 뿐입니다.
사도행전 4장엔 그가 40여세가 되었다고 하는데 40여 년 동안 장애자로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기능과 역할을 상실해 가치가 없는 존재로 버려졌습니다. 태어나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자신은 꿈을 펼칠 수 있는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외적인 장애와 함께 내적인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좌절하며 살아왔습니다. 그의 삶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이 얼마를 적선해주느냐에 따라서 그 날 하루 삶의 질이 결정되는 사람입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40여 년을 살면서... 하체가 마비된 고통가운데 살아갑니다. 왜 이 사람이라고 자신의 아픔을 극복을 해 보려고 애를 안써 보았겠습니까? 한 때는 일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10년 20년 세월이 흐르고, 30년 40년을 살았지만,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그는 절망하다 못해... 체념한 채로 하루하루를 고통 중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가족들의 원망과 탄식을 들어야만 했을 것이고,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비아냥도 참고 많은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비록, 성전 문 앞에까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그의 필요를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길거리에서 동냥이나 해서 먹고살라고... 그를 길거리의 거렁뱅이로 방치했습니다.
그는 지금 의미 없이 늘 상 해 왔던 것처럼 구걸합니다. 운이 좋으면 남이 던져주는 몇 푼의 돈으로 오늘 하루도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지금 이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성전 미문입니다. '미문'은 한자어로 '아름다울' 미(美)자와 '문' 문(門)자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문'이란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을 흔히 ‘헤롯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시대 스룹바벨이 지은 두 번째 성전을 유대왕 헤롯이 크고 화려하게 확장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집니다. 이 헤롯 성전에는 문이 8개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남쪽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니가노르 문(Nicannor Gate)’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문을 ‘미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문은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통하는 문인데, 이 문을 미문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그 문이 말 그대로 너무너무 아름다운 문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문은 높이 23미터나 되고, 넓이도 약 18미터나 되는 아주 큰 문입니다. 크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아주 아름답게 지어진 문이기도 합니다. 당시 가장 값비싼 고린도산 황동으로 만들어진 이중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책임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가 앉아있는 현장은 성전 문 앞입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교회를 들어오는 입구 정도가 아닙니까? 지금 이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배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향하여 예배를 드리려 가지만, 어느 누구하나 이 구걸하는 병든 영혼에 대하여 부담을 지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배하러 가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그가 원하는 돈 한 푼을 던져주며 그의 형편에 동정할 뿐이지, 어느 누구도 이 불쌍한 영혼을 일으키려는 열망이 없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요 4:23-24절에 보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주님은 왜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참된 예배만이 인간의 내면의 깊은 갈증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또 무언가를 찾아 소유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유에 매달려 집착하고 있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면 그것이 내 인생을 만족시켜 줄 것처럼 지금도 온 생애를 불사르는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을 만나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목마름이 해결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마시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예배가 하나의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안 드릴 수 없어서 드리는 예배라면, 그것은 변질된 예배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 예배를 안 드리면 무언가 좀 찝찝하고, 한 번 드리면 한 주간이 평안할 것 같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사고 나지 말라고 차에 성경책을 둔다고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꿈자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성경을 베고 잔다고 합니다. - 이것이 바른 주님이 원하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종교행위에서는 누구보다도 열심이었고, 완벽하게 절기를 지켰고, 겉으로 보면 손색이 없었는데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역겨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예배는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형이 아니라 내용을 보신 것입니다. 주님은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예배의 전 영역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는 예배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일주일의 6일 동안의 시간은 주일 예배를 위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주일은 첫날이고, 하나님을 먼저 예배하고 일주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 위해서 토요일은 굉장히 중요한 날입니다.
몸과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주일에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예배당에 먼저 와서 기도하며 예배를 준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면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그 예배의 자리에 머물면서 예배의 여운을 즐기는 것입니다. 멋진 음악회를 가면 마지막 곡을 듣고 나서도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고 압도하는 음악의 세계에 빠져 여운을 즐깁니다. 우리의 예배는 그 음악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며 그 임재의 한가운데에서 예배가 마쳤지만 일어설 줄 모르고 장내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경험하면, 세상의 모든 영광이 빛을 잃을 것이고, 더 이상 세상의 것을 향해 침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그것들이 나를 유혹할 수 없고, 완전한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그가 앉아있는 현장은 성전 문 앞입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교회를 들어오는 입구 정도가 아닙니까? 성전 앞에 있으면서도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거나 영생을 얻기를 원한 것이 아니고 물질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리 중요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전에 나가는 사람들의 돈주머니였습니다. 사실 그들이 던져주는 돈이 앉은뱅이에게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책임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치료받는 현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에 우리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향하여 예배를 드리려 가지만, 어느 누구하나 이 구걸하는 병든 영혼에 대하여 부담을 지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게 중에는 간혹 이 못 걷게 된 이에게 그가 원하는 돈 한 푼을 던져주며 그의 형편에 동정할 뿐이지, 이 불쌍한 영혼을 일으키려는 열망이 없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4/20일에 나라가 장애인의 날을 시작한지 36년이 되는 때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복지가 많이 향상 되었지만. 아직도 사각지대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도 16년전에 실로암 대학을 열어 장애우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장애를 갖고 산다는 것은 일상의 삶에 비장애를 가진 사람들보다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누군가가 평범한 사람이 갖지 못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또 그것이 살아가는 데 자신의 삶 자체를 흔들 수 있는 고통이라면 얼마나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우리는 장애인하면 선천적 장애인을 연상하지만 장애인중 선천적 장애인은 20%미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80%는 다 후천적 장애인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산업화되면서 더욱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삽니다. 이로 인해 산업 재해나, 교통사고, 그리고 약물 과다 복용이나 남용은 우리의 삶의 환경을 공통으로 빠뜨리는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요즘 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되는 가습기에 들어간 약품이 한 가족의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가는 아픔을 보지 않습니까? 설령 살아있는 아이들도 심각한 후유증으로 장애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노인성 질환들이 증가하면서 우리는 많은 후천적 장애인들을 양산하는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 역시 지금은 건강할지 모르지만, 우리 역시 언제 어디서 장애의 고통을 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가운데 과연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을 통해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잘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1.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말은 응시했다(gaze)는 말입니다. 관심을 갖고 집중했다는 말입니다. 걸인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언뜻 그의 눈앞을 지나가는 행인 가운데 하나로 보였을 뿐인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응시해 보았습니다. 주목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보라!” 여기서 ‘보라’는 말은 주목하여 보라(look at)는 말입니다. 건성으로 아무 의미 없이 쳐다보는 걸인을 향하여 자신들을 똑똑히 보라는 것입니다. ‘똑바로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라,” 참으로 권세 있는 말씀입니다.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합니다. 이제 너의 시선이 물질에 두지 말고 새로운 관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쳐다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바라봅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칩니다. 이렇게 눈과 눈이, 마음과 마음이 마주칠 때에 베드로가 말문을 엽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요.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한푼 동냥에 인생을 걸었던 그 앉은뱅이에게 베드로는 외칩니다. ‘나는 네가 관심을 갖는 니가 원하는 돈은 없다. 그것을 구하려면, 너는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주노라. “예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노래한 그 노래들은 지난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수없이 많은 노래들의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닙니다. 사실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한 복판에서도 예수 그 이름 하나 때문에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형수로 죽어가면서 뒤늦게나마 그 이름 예수를 믿은 것에 너무 감격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맹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가슴속에는 그 것이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를 외쳤던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여러분, 이 성전 미문을 지나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지난 날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전형적인 어부들입니다. 당시 이들은 세상 앞에 소외된 자들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던 천민들이었고, 배운 것도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제자가 될 만한 어떤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신경질적이고,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혈기 부리기가 일쑤이고,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으면서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 없는 행동하다가 예수님께 책망들은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길 마음이 일어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살아 계시는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 마음속에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삶이 변화하기 전의 눈으로 볼 때까지만 해도 앉은뱅이는 관 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사랑이 넘치기 시작할 때 비로서 그들은 주님의 관심과 뜻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게 하셨기에, 이제는 주님의 마음을 담은 두 사람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앉은뱅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여기 보세요!! 베드로와 요한은 그 앉은뱅이에게 외칩니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금이나 은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예수가 있습니다. 이야기하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여기 7-8절을 보십시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망 없는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의 계기는 바로 기도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것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성령이 불같이 임한 것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력으로 말하자면 한번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교인 수로 말하자면 성공한 교회였고, 교회의 재산으로 말하자면 수많은 사람들의 재산이 교회 수중에 있었으며, 성도들의 가슴에 불러일으킨 헌신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일상적인 모든 생활을 떠나서 함께 모여 기도하며 공동생활을 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도자 두 사람이 시간이 되 매 기도하러 올라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절실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쁜 가운데서도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며 회심한 성도들은 교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 있던 교회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가 있었고, 또 그들의 필요와 그들의 문제를 끌어안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사람이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9-10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그를 본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그가 지금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뛰고 있다는 것입니다.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얼굴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 백성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과거는 비참한 과거였고, 우울하고 수치스러운 과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 행복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여기 모인 우리들의 기쁨이어야합니다. 더 이상 자기를 성전 미문에 데려다 줄 사람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없습니다. 비가 와서 그 날 구걸을 공칠까봐 염려하는 일이 이제는 없습니다. 이제는 그런 두려움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 필요함과 두려움과 염려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는 지금부터 16년 전에 10명 미만의 장애를 가진 분들과 함께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 일을 위해 수고하신 고 신용태 선교사님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선교지에서 실명을 하고 신장이 깨져 하루에 3번씩 투석을 하며 간에 치명적 손상으로 더 이상 장애를 극복할 수 없는 그 절망의 환경 속에서도 이 실로암 대학을 교회에 정착을 시켰습니다. 비록 그 분은 가셨지만, 이제 우리는 16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자세로 장애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장애우와 함께 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장애라고 하는 것은 정말 특별한 운명을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 80%인 만큼 언젠가 나에게도 그러한 일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나이가 들면 동일한 어려움을 우리가 겪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그 불편함과 아픔과 절망과 좌절을 나도 겪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육체적 장애보다 더 본질적인 장애, 가장 무서운 장애는 영적인 장애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장애예요. 그러므로 교회는 베드로가 외쳤던 것처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는 이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구원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과 세상을 향해 복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의 목적이 바로 복의 근원(=복의 통로)이 되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축복의 웅덩이가 아닙니다. 흘려보내는 축복의 시냇물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머리 둘 곳조차 마땅치 않는 삶을 사셨지만, 그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 남기지 않으시고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제 이 사랑, 이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생각해도 미덥지 못한데 주께서 한번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이 사랑,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예수의 능력을 붙잡고 소외되고 아파하는 이웃에게 다가가는 그래서 함께 기도하며 세워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