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향하여- 27 \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 행17: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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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8-24본문
오늘도 주일 예배에 동참한 모든 성도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터치 153 새 생명 축제를 시작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태신자를 세우고 그들을 위해 모두가 기도하며 한 생명을 전도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삼고초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사로 유비가 융중에 있는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가는 정성을 보였다는데서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까? 유비는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에도 두 번씩이나 허탕을 치며 성의를 다해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되자 사흘이나 목욕재계를 한 후 다시 제갈량을 찾아갔습니다.
어떤 면에서 삼고초려는 태신자를 품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뭐, 차이가 있다면 유비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제갈량을 찾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그 영혼들을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유비의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 제갈량의 탁월한 재능이었다면 우리의 발걸음을 끄는 것은 하나님을 모른 채 지옥으로 걸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그 동안, 모두가 부담을 느끼는 전도에 대해 왜 이 강단에서 귀가 따갑도록 외치고 있습니까? 왜 그토록 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엄청난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죄인인 인간이 지옥에서 당해야 하는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요즘 지옥에 대한 설교를 우리가 들어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교인들조차도 이 내세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갤럽 조사 보고서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얼마 전에 조사가 끝난 거예요. 아주 최근의 조사이지요. 이 조사에 의하면 목사님들이 어떤 설교를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교인들이 희망하는 설교의 주제에 대해서 내세에 대한 설교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구원과 영생을 포함한 내세에 설교를 듣고 싶다는 교인들의 퍼센테이지가 1.5% 예요.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에요.
지금 우리는 새시대를 사도행전을 통해 새시대를 열어가는 주의 종들의 눈물 겨운 모습들을 보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자신의 계획에도 없는 유럽 전도를 하는 과정을 우리가 살펴보고 있지 않습니까? 가는 곳마 다 무시와 천대를 받습니다. 심지어는 목숨마져 위태로운 고난의 길을 걷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성과 지성의 도시라는 아덴에 도착을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제일 먼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우상으로 덮혀 있는 그 광경을 본 바울은 바울의 반응은
Ⅰ. 격분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16절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이 "격분"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화가 났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사람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과 분노가 섞여 일어난 거룩한 격분이었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은 아덴(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도시가 온통 우상으로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22-23절에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이것이 바로 아덴의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이 아덴 사람들은 다른 어떤 민족이나 지역의 신에게서 받을 복을 놓치거나 혹은 그 노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소위 '무명의 신'까지 섬겼던 것이었습니다. 네로 시대에 아테네 광장에 서 있던 공중 우상이 300개였고, 기타 신상들은 3만 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아테네 거리에는 사람보다 신이 더 많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격노할만하지 않습니까? 우상숭배는 단순히 돌이나 나무 앞에 절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을 의지하며,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바울은 골3:5절에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고 말씀합니다.
탐심은 헬라어로 “더 가지고 싶다, 끝없이 채우고 싶다”라는 뜻입니다. 한 번 얻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채워야 한다고 느끼는 마음이지요. 결국 탐심은 ‘하나님 한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탐심을 곧 우상숭배라고 단언한 겁니다. 탐심이 왜 우상 숭배인 것은 첫째,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돈과 성공과 성취에 마음을 다 걸어버립니다. 둘째, 신뢰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지켜주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통장 잔고야.”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탐심은 곧 신앙이 됩니다. 셋째, 정체성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라는 확신보다는 내가 가진 것과 누린 것으로 나를 증명하려 합니다.
오늘 젊은 세대, 30대 40대가 특히 그렇습니다. 집값, 자녀 교육, 직장 경쟁 때문에 늘 비교하고 불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헌신과 헌금이 점점 약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헌금하면 손해 아닌가? 시간 드리면 나만 뒤처지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속에 두려움과 탐심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현실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성공, 스펙, 부동산, 자녀 성취, 재테크, 건강, 외모, 팔로워 수가 우리 마음의 제단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철학과 지성을 가진 것으로 대단한 것처럼 여기지만, 실상은 늘 불안 속에 살아야했습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제단을 세웠습니다. 혹시 빠트린 신이 있어 재앙이 오면 어쩌나, 내 삶이 망가지면 어쩌나—두려움 때문이죠. 오늘 우리도 비슷합니다. “혹시 내가 뒤처지면? 혹시 내 아이가 질까?” 그 두려움이 우리를 더 갖고, 더 누리고, 남과 비교해서 우월해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끌고 갑니다.
이제 질문을 던져봅시다. 혹시 예배드리지만, 실제로는 물질과 명예, 편리함과 성공을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문제는 탐심이라는 우상은 만족할 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갈 데까지 가게 됩니다. 결국은 그 우상숭배의 끝은 절망입니다. 왜냐하면, 그 우상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Ⅱ. 세상에 담대히 복음을 증거합니다. (17-18절)
바울은 이 현실 앞에서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즉시 "회당"에서 전도를 시작했으며 또한 "장터"에서도 노방 전도를 하며 그들과 변론을 시작했습니다. 17절에 나오는 변론은 상대와 묻고 답하는 대화신 토론입니다. 이는 단순히 외쳐대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이해하도록 진리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18절에는 당시 아덴에서 최신으로 유행하고 있던 두 대조적인 학파의 철학자들을 만나 "쟁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힘들고 두려움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바울과 일행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 앞에 복음을 전합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도 바울이 서 있던 아덴과 비슷합니다. 겉으론 멋있고, 문화적으로 앞서 있고, 지식인도 많고, 종교와 철학이 넘쳐나지만, 정작 하나님을 모르는 영적전쟁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전도할 때 가장 많이 하는 걱정이 뭔지 아세요?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상대가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하지? 내가 지식이 부족한데, 괜히 말하다가 부끄러우면 어쩌지?” 이런 두려움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마10:19-20절 말씀에 세상이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오늘 바울을 보세요. 바울은 아덴이라는 거대한 지식의 도시, 철학자들의 본거지에 섰습니다. 겉으로 보면 너무나 불리한 자리입니다. 수많은 철학자, 종교인, 지성인들 앞에서 혼자 서 있는 바울, 얼마나 위축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당당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바로 성령께서 말씀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혜가 많아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그 순간마다 필요한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에요. 고전2:4절 말씀처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 바울은 학문으로 철학자를 이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능력, 예수의 부활 사건을 증거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는 내가 준비한 말을 잘 외워서 전달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준비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성령의 도우심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해도, 내가 말이 서툴러도, 성령께서 내 입술을 통해 일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나아가면, 성령께서 그 상황에 맞는 말씀을 주십니다. 때로는 성경 구절이 떠오르게 하시고, 때로는 내 삶의 간증을 자연스럽게 꺼내게 하십니다. 때로는 짧은 한마디가 듣는 이의 마음을 찌르는 화살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 보면 이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까지 데리고 갑니다.
Ⅲ. 아레오바고 언덕에 선 바울(19-23)
이 아레오바고는 아덴시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한 집회 장소로서 아테네 시민의 공적인 회의와 토론이 이루어지던 곳이었습니다. 또한 이 아레오바고는 아덴시의 재판소이기도 했는데,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가 501명의 아테네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으로부터 유죄판결과 사형언도를 받은 곳도 바로 이 "아레오바고"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계 최고의 철학의 도시에서 당시 지성이라고 일컽는 현장에선 바울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아무리 복음을 위해 살아온 바울이지만, 이 낯선 환경은 낭만적인 현장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에 불과한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이름 없는 시골 동네에서 출발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처럼 큰 무대 '아덴'에서 문자 그대로 세계 최고를 상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도저히 '게임도 안 될 일'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대강당에 노벨상 수상 경력들이 찬란한 대 석학들만 가득 모여 있는 가운데 연단에 올라서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면, 아마 모르긴해도 입이 얼어붙어 버리기 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교만과 아집이 버무려 있는 당시 지성인들이 모인 이 도시 한복판에서 그는 외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흘만에 살아나셔서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이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 생명의 복음을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여러분 바울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아시다시피 그는 누구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 무서운 핍박자였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철학과 신학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 앞장을 섰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일에 모든 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예수 믿는 사람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도저히 예수를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생을 송두리째 변케 한 사건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이 가졌던 세상적인 지식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 온갖 고난, 수모를 겪었습니다. 결국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순교를 당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 바쁜데도 불구하고 아산에서, 포천에서 수원에서 이곳 저곳에서 오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신 분들과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등록하신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왜 여러분은 여기 와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새가족으로 오늘 나오신 여러분은 아마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외칩니다. “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 그리스도입니다. 믿으십시오”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물러서면 안됩니다. 내 남은 그 생명 하나 바쳐서라도 예수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사람이 바로 우리이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상앞에 찌든 인생들 앞에 외친 복음을 듣는 저들은 충격을 받지 않겠습니까?
‘예수가 무엇이길래 예수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리면서까지 남은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저렇게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여 나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는가? 예수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영생을 얻는 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인가?’ 사람들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그만큼 진지하게 나오기 때문에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희생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능력 있는 전도를 못합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전도의 현장에 가보십시오. 그곳에는 반드시 생명을 거는 희생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진지하게 자문자답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우리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주님은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터치 153 새생명 비전을 선포식을 갖습니다. 이 비전은 단순히 숫자를 채우는 목표가 아니라, 바울이 느꼈던 그 지옥으로 떨어질 영혼을 향한 거룩한 격분과 사랑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상으로 가득한 아덴을 향해 바울이 서 있었듯, 세상 욕망과 중독으로 가득한 이 시대 앞에 우리도 담대히 서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만난 예수, 내 삶을 바꾸신 주님을 담대히 증거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은 “화 있을진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고전 9:16)이라고 고백했지요. 그 고백은 억지나 의무가 아니라, 십자가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의 아레오바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옆의 이웃, 내 자녀, 내 친구, 내 동료가 내가 서야 할 아레오바고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통해 주신 새생명 비전은, 바로 각자가 자기의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바울처럼 말합시다. “나는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 교회의 비전이 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불꽃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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