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보답할꼬 시1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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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7-06본문
저는 성경을 읽다가 이런 표현은 어폐가 있다고 생각해 본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감사란 깨닫고 느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까? 은혜받은 사람이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와서 자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베푼 사람이 은혜받은 사람에게 “너 나한테 감사해!”라고 명령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감사는 명령형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살전 5: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시 100:4절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골 3:17절에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런 식으로 하라, 하라, 하라 하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감사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사가 기분 좋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기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선택하는 태도입니다.
하박국은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고 말했지요(합 3:17–18). 도저히 지금의 현실은 감사를 할 수 없습니다. 감정은 도와주지 않지만, 믿음으로 선언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 감사가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되도록 노력해라”가 아니라 “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원수는 늘 불평, 낙심, 두려움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감사는 그런 어둠을 몰아내고 하나님을 높이는 무기가 됩니다. 감사할 때 마음이 밝아지고, 환경을 이길 힘이 생기고, 믿음이 자라납니다. 시편 50:23에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감사는 그냥 예의바른 태도가 아니라, 사탄의 거짓과 절망을 깨뜨리는 능동적인 행위이기에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살전 5:18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이고, 그분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지금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반응이기에, 주님은 당연히, 반드시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맥추감사절입니다. 광야 40년의 삶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와 첫 농사를 한 첫 열매를 볼 때 얼마나 감격이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가나안 정착 백성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신이는 하나님임을 알게 하시고 첫 열매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쉽게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는 그렇게 간절히 울부짖었는데, 막상 풍성해지면 감사보다는 불평을 하기 쉬운 게 인간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절기를 통해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 16:12절에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감사는 훈련입니다. 절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반복해서 기억하고 되새김질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감사를 잊어가는 우리에게 다시한번 감사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간, 다윗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는 말씀을 잘 깨닫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6편은 다윗이 경험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셨는지 고백하는 감사의 시입니다. 특별히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12절에 “내가 여호와께 받은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며 진심으로 고백하는 다윗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무엇보다
Ⅰ.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8절 말씀을 보세요.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다윗은 절박했던 상황을 회상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망의 위기, 절망의 환경에서 아무것도 할 수없었던 그 자리에서 그냥 쏟아지는 눈물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 그리고 넘어져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연약한 자신. 이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영혼을, 눈을, 발을 건져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하루 아침에 왕이 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모습을 보면 가여우리만치 상처를 안고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시절을 잘 표현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시 102:6-7절에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광야의 당아새, 황폐한 곳의 부엉이, 밤새도록 외롭게 앉아 떨고 있는 지붕위에 참새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그 감정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고독하고 처절하였는가를 쉽게 느낄 수 있는 표현입니다.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런 저런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내 인생이 여기까지 오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여러분! 이 시간. 자식 때문에 우리에게 탄식이 있지 않습니까? 결혼생활 때문에 오는 부부간의 상처가 있지 않습니까? 사랑했던 연인에게 당한 상처가 도져서 그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분, 또 질병 때문에 그 고통으로 그 두려움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까? 죄 때문에 받은 상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인생을 향해서 우리 예수님은 상한 갈대요 꺼져 가는 등불의 한 심지와 같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다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상처가 있어요, 질그릇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오늘 다윗도 자신을 돌아 볼 때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스스로 일어 날 수 없었습니다. 여기 8절 하반절에 “건지셨나이다”는 스스로 회복 불능인 자기를 그 절망의 현장에서 꺼집어내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으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 감사하며 기뻐하는 사람, 늘 웃으며 얼굴이 밝은 사람으로 변해집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영혼이 어두워지고 불평하고 탄식하는 사람이 됩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깨달음의 여부가 우리 인생을 밝게도 어둡게도 만들 수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깨달을 때 모든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Ⅱ. 구원의 잔을 들고 간증자로 보답하기를 원합니다. 13-14
13절에 보면"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이는 도무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이 없는 자기를 이처럼 자녀 삼으시고 자신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사랑에 감격을 ‘구원의 잔’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신앙인의 최고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을 뿐 아니라 이처럼 축복의 자리까지 인도하신 그 주님의 이름을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압니까? 우리는 절대로 실패자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어떻게 인생을 살다가 가든지 우리는 절대로 실패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바로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나중에 권력 기반이 잘 닦이고, 힘을 쓰기 시작하자 못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소유하기 위해 남편을 죽이고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왕이기에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주 못된 죄악이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얼마나 회개하느라고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시52:12) 그가 범죄하기 전에는 '나 같이 이름없는 목동을 하나님께서 크게 보셔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삼하5:12)는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물을 펑펑 쏟을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고 찬송하며 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흥분을 느끼며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자 구원의 기쁨이 마음 속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음이 지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나중에 죄를 회개하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구원의 기쁨을 다시 회복시켜주세요. 그러면 내가 모든 죄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죄인들이 내가 전한 복음을 듣고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14절 보면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그랬습니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입니다. 본문에 그 구체적인 내용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대개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제는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서원을 많이 하죠. 극한 고난 중에 있을 때, 질병 가운데 있을 때 눈물로 기도합니다. ‘주님! 이 고난과 질병을 해결해 주시면 정말 신앙생활 잘 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이러한 서원대로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며 사는 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Ⅲ. 섬김과 찬양으로 보답하는 인생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16-17
마지막으로, 16-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다윗은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음에서 건져주셨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17절 보면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랬습니다. ‘감사제’는 구약 제사법 가운데 자발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리는 희생 제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 무언가 자꾸 드리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헌신은 내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엄밀히 말하면 헌신되어지는 겁니다. 저절로 이끌려서 헌신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겁니다. 고전15:10에도 보면 비슷한 고백이 나옵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면 할수록 더욱 더 수고하고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고, 마지막에는 순교의 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되어 감격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기에 아까운 것 없이 주님을 위해 드리게 됩니다.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몸도, ... 모든 것을 드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도 리더십을 위해 쓰여진 책 가운데 꾸준히 읽히는 밥 포드의 하프타임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가운데 “성공추구에서 의미 찾기로 바꾸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결산이 가까울수록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에 내 삶을 바치며 살아왔느냐입니다. 저자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느냐, 내 이름이 남느냐, 그런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와 보람과 기회를 발견하고 “하나님,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일 때문에 내 인생은 보람 있었고, 신바람 나고, 놀라운 인생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 평생의 보람 있는 가치를 발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2025년도 꼭 반을 살아 온 현장입니다. 여러분의 전반기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이 남은 2025년도 후반기는 어떻게 계획을 하시고 계십니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제 남은 후반기에 감사의 씨앗을 심으시길 바람니다. 감사는 기적의 씨앗입니다. 아-멘 . 우리의 삶을 너무 분주하게 살면서 잊어버렸던 감사를 회복하는 시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억지로라도 감사하며 사십시다. 그래서 그 감사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더욱 풍성히 누리십시다. 감사는 하늘의 은혜를 내 삶으로 끌어오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우러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서라도 해야 합니다. 감사를 창조하는 신앙-그 신앙이 하늘의 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의 고백처럼 내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넘어짐에서 일으켜 주신 그 감격을 가지고 구원의 잔을 높이들고 감사의 기적을 써내려 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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