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시대를 향하여 (29) - 우리가 갈망하는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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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9-07본문
우리가 갈망하는 부흥 행19:17-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흥”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을 솔직히 바라보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코로나 이후로 영적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예전에는 교회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고, 눈물로 기도하며, 선교와 전도를 위해 자기 삶을 드리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헌신과 열정, 충성이 점점 사라지고, 교회는 점점 개인화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많은 성도들이 이 위기의식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는 원래 이렇게 흘러가는 줄 알고, 세상 흐름에 익숙해져 버린 것입니다.
미국의 교회 성장 연구가인 조지 바나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개구리를 끓는 물에 바로 집어넣으면 깜짝 놀라서 뛰쳐나오지만, 미지근한 물에 넣고 조금씩 온도를 올리면 결국 개구리는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바로 그 주전자 속 개구리와 같지 않습니까? 위기의 온도가 점점 올라가는데도, 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안일하게 있다가 씻을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은 에배소 도시에 일어난 부흥의 역사입니다. 바울 당시 에베소는 세계적인 무역 도시였으며 인구가 한때 30만에 달하는 곳이었습니다. 로마 당시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로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신 로마로 불리웠습니다. 무려 2만 5천명을 수용하는 대극장, 체육관, 음악당과 거대한 쇼핑상가와 대 목욕탕 시설이 있는 도시로 세계의 많은 여성들이 에베소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후 수시로 에베소에 들러 보석과 화장품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석주 127개가 동원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테미 신전에서는 매년 5월에 세계의 호사가들을 불러 모으는 아테미 여신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도시의 겉모습일 뿐 이미 영적으로 썩을 대로 썩어버린 도시였습니다 . 바울은 이 도시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복음인 것을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무려 3년 동안 이 도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Ⅰ.영적 점검입니다.
이 에베소에는 이미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령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물어보았습니다. 바울의 질문은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도전적이고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냥 예수 믿으면 되는 거지 무슨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있을까?’하고 생각이 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가 오늘 이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기 모인 여러분은 예수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대답을 하겠습니까? 여기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믿을 때와 받았느냐는 말은 원문에 시제가 같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성령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 것입니다. 고전 3:2절에 ‘또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느니라’
이 말은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이미 성령이 내주한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았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느냐, 성령안에서 충만히 살아가느냐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평생 한번이면 족하지만 성령 충만은 거듭거듭 받아 충만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하는 것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왜 이것이 이렇게 중요한지 아십니까?
오늘 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약해진 것 같습니다. 마치 면역력이 약해진 사람들처럼,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흔들립니다. 조금만 힘든 일이 있으면 이 힘든 일을 이겨나가기 위해서 믿음이 더 강해져야 하는데 믿음이 더 약해집니다.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하는데 싸울 의사가 없습니다. 그냥 마귀한테 귀한 것들을 내어 줍니다. 바쁜 일이 있으면 신앙생활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됩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지칩니다. 짜증스러워집니다. 그 이유가 거듭났지만, 성령 충만한 삶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마귀에게 이끌려서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몸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질병이 많은데 ‘루프스’라는 병이라는 희귀한 질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우리 몸안에 있는 면역체계가 외부의 적을 공격하고 방어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 몸을 공격하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세균과 바이러스를 막아야 할 면역체계가 돌변해서, 자기 안에 있는 건강한 세포를 적으로 착각하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참 어이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전 미국에서 걸프전에 보고서에 충격적인 보고서가 발표되었습니다. 걸프전 당시 지상전에서 숨진 미군 147명중 미군 화기에 의해 숨진 희생자는 무려 35명. 사망자의 4분의 1이 적군이 아닌 아군의 총탄에 죽었습니다. 소위 ‘프랜드리 파이어’라는 용어로 아군 사격으로 적이 죽는 것이 아니라 아군의 전사가 더 심각한 상태를 말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싸우는가는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몸 안에서 서로를 보호하고 세워야 할 성도들이 오히려 상처를 주고 다투고 깎아내리고 무너뜨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적은, 너희의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고요. 누군가가 당신에게 짜꾸 싸움을 걸어옵니까? 자꾸 회가 나게 만듭니까? 도저히 못 참게 만듭니까? 그러면 그 사람을 보지 마시고 그 사람 뒤에 있는 그 사람을 조종하여 당신에게 다가오고 당신을 화나게 하는 영적인 악한 존재를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이들이 강한 자로 세우기 위해
Ⅱ. 제자훈련을 합니다.
8-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달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여기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란노 서원은 오늘날로 치면 철학관, 강당, 일종의 대학 같은 곳이었습니다. 세상의 학문이 논쟁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고, 거기서 제자들이 길러졌습니다. 바울은 12명의 제자를 세워, 그들을 말씀으로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흩어져서 에베소와 온 아시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10절에 보면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즉, 바울은 제자 훈련을 통해 복음의 확산을 준비한 것입니다. 바울의 전략은 단순히 ‘내가 다 전하겠다’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를 세워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는 누구입니까?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위기를 극복할 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은 제자가 세워질 때, 교회는 다시 살아납니다. 여기 보십시오.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상업과 문화, 그리고 아데미 신전으로 유명한 우상 숭배의 도시였습니다. 이곳에 어떤 역사가 나타납니까?
Ⅲ. 믿는 자들의 회심입니다. 17-19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모아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여기 오늘 에베소 교회에 일어난 이 놀라운 일을 보십시오. 무엇이 이 오만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교만한 헬라인들로 하여금 두려움 가운데 떨며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예수의 이름을 떨리는 음성으로 찬송하게 만들었습니까?
17절에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란 말은 그 배경은 바로 13절에 나옵니다.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직업처럼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바울을 흉내 내면서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에게 명하노라!” 하고 귀신을 내쫓으려 했습니다. 그때 귀신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지만 너는 누구냐?” 그러더니 귀신 들린 사람이 달려들어 그들을 이기고 옷을 찢고 상처투성이가 되게 했습니다.
이 소문이 온 에베소에 퍼지자, 사람들이 깨달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구나. 흉내 낼 수 있는 이름이 아니구나. 살아 계신 권세 있는 이름이구나!” 이 깨달음 때문에 사람들이 거룩한 두려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변화는 18절에서 나타납니다. 이미 믿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했다는 것입니다. 자복이란 무엇입니까? 숨겨왔던 죄와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진짜 부흥은 불신자만 돌아오는 게 아니라, 이미 믿는 사람들이 먼저 회개할 때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세상 방식을 붙들고 있던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모양만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름의 권세가 드러나자, 그들의 양심이 찔렸습니다. 그래서 숨겨왔던 죄를 드러내며 회개한 것입니다. 이들이 성령 충만하니까, 복음을 전합니다. 에배소에 영적 지진이 일어 납니다.
여기 19절을 보십시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여기서 “은 오만”은 그냥 책값이 아닙니다. 드라크마는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은 5만 드라크마라면 곧 5만 일치의 임금, 즉 137년치 품삯입니다. 하루 일당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3-4천억 원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단순히 책 몇 권 불태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삶을 지탱하던 경제적 기반, 생업, 미래의 안전망까지 주님 앞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현대적으로 예를 들면, 집 한 채, 평생 모아둔 퇴직연금,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는 결단과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회심입니다. 단순히 “나는 예수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넘어서, 삶 전체의 주인이 바뀌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부흥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삶이 변하고, 가치관이 바뀌고, 우상이 무너지는 곳에서 부흥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부흥을 기대하십니까? ’토미 테니‘라는 목사는 ’갓 캐처스‘라는 책에서 부흥을 태동시키는 힘을 ‘배고픔’이라고 정의합니다. 부흥을 일으키는 선구자는 훌륭한 설교자도 아니요 훌륭한 복음성가 가수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부흥을 태동시키는 선구자는 바로 우리의 ‘배고픔’이라고 말합니다. 부흥은 우리의 영적인 배고픔,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배부른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보고도 식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반대로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보는 순간 입 안에 군침이 돌고, 먹고 싶은 갈망을 느낍니다. 우리는 부흥을 위해서 무슨 갈망을 가져야 합니까?
첫째, 개인의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내 삶에 붙잡고 있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둘째, 교회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세워진 제자훈련을 통해, 다시금 교회가 본질을 붙잡아야 합니다. 셋째, 이 지역과 이 민족이 변화를 이끌어 가야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합 2:14) 퍼져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뜩이나 인구 감소시대에.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에게. 교회가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마약, 우울증, 고립 문제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펼쳐 나갈때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온 땅에 펼쳐 나가는 빛과 소금의 역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한국 교회가 회심 없는 부흥을 갈망해서는 안 됩니다. 값싼 은혜로는 부흥이 오지 않습니다. 에베소에 임했던 것처럼, 우리가 먼저 회개하고, 성령 충만한 삶으르 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이 제자로 세워지고, 삶 전체를 주님 앞에 드릴 때, 하나님은 다시금 주의 말씀이 힘 있게 흥왕하는 부흥의 역사를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0절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성도 여러분, 부흥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의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능 있게 역사할 때, 개인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도시가 변합니다. 에베소 도시는 결국 말씀의 권능으로 뒤집혔습니다. 우상의 도시가 복음의 도시로 바뀐 것입니다.
이 엄청난 일들이 우리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이번 터치 153 새생명 축제에 여러분 한분도 빠짐없이 눈물로 기도하고 태신자를 작성하여 여러분들이 세운 그 한 사람 이 예수를 만나 삶이 달라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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