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향하여(34) 꺼지지 않는 사명의 불 | 행26: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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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11-30본문
얼마 전에 눈길을 끈 광고가 있었습니다. ‘아픔 없이 성공 없다’, ‘1년만 미쳐라’는 광고입니다.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앞만 보고 나가라는 희망을 주는 광고입니다. 최근에 서점에 가보면 ‘미쳐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들이 많습니다. ‘공부에 미쳐라’, ‘건강에 미쳐라’, ‘자기계발에 미쳐라’, ‘20대, 인테크에 미쳐라’, ‘서른 살, 만남에 미쳐라’등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불안한 미래를 극복하기 위해 '갓생(God+생, 완벽한 삶)'을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합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운동하고, 출근 전 영어 공부를 하고, 퇴근 후에는 주식 공부나 부업(N잡)을 합니다. 이들은 자기 계발이라는 목표를 위해 수면 시간까지 줄이며,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열정 중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공과 돈, 짧은 유행에 이처럼 '미쳐서' 인생을 쏟아붓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오늘 세상의 성공이 아닌 하늘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던 한 사람, 사도 바울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에 보았던 사도행전 24장의 사건이 일어난 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의 일입니다. 지금 본문은 바울이 유대인의 고소에 맞서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앞에서 최종적으로 변론하는 장면입니다. 이 자리에는 로마 총독 베스도뿐만 아니라, 헤롯 가문의 왕인 아그립바와 그의 누이 버니게가 참석했고, 가이사랴의 유력자들까지 다 모인 자리였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어떤 큰 죄를 저질렀기에 왕 앞에 서게 되었는지 궁금해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던진 말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도 엄청난 도전을 던집니다. 바로 “결박 당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선포입니다. 한낱 세상 사람의 눈에는 죄수로 여겨진 이 바울이 세상의 권력자 앞에 던진 메시지입니다. 도대체 바울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세상 권력 앞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까? 오늘날 세속화의 물결 속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저항 한번 하지 못한 채 복음의 능력을 잃어가는 무기력한 모습 속에서 큰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스 기니스가 쓴 ‘저항’이라는 책을 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 시대를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날의 신앙의 선배들이 살았던 시대는 신앙의 포기를 요구하는 시대였다면, 오늘은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지키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시대를 향하여 34번째 사도행전을 대하면서 성령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깨닫기를 바랍니다.
Ⅰ. 세상은 복음을 '미친 소리'로 오해합니다. 24-26
여기 베스도는 당시 로마에서 파송한 총독입니다. 대단한 권력자입니다. 24절에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여기 "네가 미쳤다"고 했습니다. 여기 미쳤다는 표현은 ‘마이네’라는 단어로 우리가 쓰는 매니아라는 말과 같습니다. 지금 베스도는 바울을 향하여 ‘너 지금 광기에 사로잡혀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내용은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과 고관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재판정에 선 죄인에게 최후변론의 기회가 주어지면 대부분은 가벼운 처벌을 받기위해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며 선처를 구합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으니 용서해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최후변론의 기회가 주어지자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였던 자신이 왜 율법을 포기하게 됐는지, 그리스도인들을 발본색원하여 처벌하는 일에 앞장섰던 그가 왜 십자가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 바울의 이야기를 듣던 총독 베스도가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며 바울을 미친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무지를 미친탓으로 돌리는 베스도의 비난에 대해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온전함을 진술합니다. 25절에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바울은 미친사람 취급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베스도의 말대로 사도 바울은 당대의 유명한 석학이었습니다. 헬라의 학문이며, 로마의 법률이며, 유대의 전통이며 두루두루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출신성분도 대단했습니다.
바울의 그만한 경력과 배경이면 교육계로 진출했더라면 국립대학의 총장 정도는 했을 것입니다. 사업계로 진출했더라면 대그룹의 총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정치계로 진출했더라면 지방 총독은 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런 바울이건만 지금은 사람들로부터 모욕거리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바울이 이처럼 세상 앞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여러분도 아시지만 사도 바울은 본래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믿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를 갈고 미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눈뜨고 봐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싫어했는지 아십니까?
행26:9-11절을 보세요.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이는 한마디로 예수 믿는 자를 잡아다 죽이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기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이 말은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얼마나 싫어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오늘날 이슬람 과격파인 is테러 단체를 보세요.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에 세계 각 곳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키며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을 무참히 죽이는 일을 하는 것처럼 바울도 과거에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드리고 죽이는 일에 생명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을 알았던 베스도가 달리 설명을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24절에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네가 미치지 않고는 이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미쳤다고 하는 베스도에게 말합니다. 25-26절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무슨 말입니까?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게 아닙니다. 지금 나는 참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메달아 죽인 그 예수가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닙니까? 왕께서는 그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다 알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디 한쪽 구석에서 일어난 일입니까? 온 천하가 다 아는 일이 아닙니까?"베스도 총독이 미쳤다고 하는 바울은 제 정신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미치지 아니했습니다.
Ⅱ. 논쟁 대신 복음의 본질로 (27-28)
여러분, 바울이 재판을 받는 이 장면을 보면 참 놀라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또 재판석에는 베스도 뿐 아니라 아그립바 왕이 나옵니다. 이 왕은 로마의 승인을 받은 분봉왕입니다. 바울은 이 왕에게 이야기 합니다. 27절에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들을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여러분, 이건 보통 피고가 절대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왕 앞에서, 권력 앞에서, 재판받는 자리에서 바울은 자신을 살리려 하지 않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왕 앞에 선포합니다. 왜일까요? 바울은 왕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가 왕에게 흘러가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마음은 ‘내가 풀려나는가’가 아니라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가?’에 있었습니다. 28절에서 아그립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신앙 질문이 아닙니다. 왕의 양심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아그립바는 명확하게 “믿는다” 또는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아그립바는 로마 황제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위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도 알아야 했고, 로마의 시선도 의식해야 했습니다. 그가 “나는 선지자들을 믿는다”고 하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유대 지도자들과 갈등이 커집니다. 반대로 “나는 믿지 않는다”고 하면 유대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잃고, 백성들의 반발을 받게 됩니다. 결국 그는 진리보다 정치적 계산이 앞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들을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이는 바울의 말은 단순한 설교가 아니라 왕을 향한 초청이었습니다. “왕이여, 당신도 예수님 앞에 서십시오. 당신도 믿으십시오.” 아그립바는 그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인정하는 순간 그는 삶의 방향, 가치관, 자리, 권력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부담이 생깁니다. 당당해야 할 자리에서 비겁한 모습이 됩니다.
Ⅲ. 죄수의 담대한 소원: “결박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29)
지금 바울은 세상 법정 앞에 권력자들에게 잘 보여서러도 형량이 감소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29절에 “바울이 이르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적으나 많으나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겁 없는 행동을 할 수 있나요? 이 말은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불붙은 영혼에서 터져 나오는 야성의 외침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신앙의 야성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먼저 성령의 불에 사로잡히십시오. 바울의 당당함, 그 담대함은 학식도, 혈통도, 사상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성령의 불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왜 약해졌습니까? 예배는 드리지만 불이 없습니다. 말씀은 듣지만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시간이 없습니다. 야성은 어디서 오느냐? 성령의 불이 우리 심령에 다시 임할 때 회복됩니다. 새벽에 다시 무릎 꿇으십시오. 성경 앞에서 다시 심장을 열어 놓으십시오. “주님, 제 마음을 다시 태우소서!” 이 기도를 회복하십시오. 성령의 불이 임하면 믿음의 야성은 다시 살아납니다.
미국 북쪽 몬타나 국립 공원에 가 본적이 있었습니다. 곳곳에 안내문이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이를 주다가 적발되면 벌금 100불을 내야 한다고 적혀있습니다. 왜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했습니다. 야생동물이 사람들이 주는 먹이에 길들여지면 야성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먹이활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게을러지고 사람이 먹이를 주지 않으면 굶어 죽습니다. 그래서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무엇보다 회복되어야 할 것은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 복음의 감격을 회복하십시오. 바울의 야성은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았고, 그 은혜를 깨달았고, 그래서 복음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야성을 잃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복음을 들어도 가슴이 메말라 있어서 어떤 기적도 능력도 기대하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도 무덤덤해요. 별로 감동도 받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지금 얼마 나 큰 죄인임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은혜에 대한 불감증 때문입니다. 하늘의 생수는 내 심령에 흘러너치지만, 그 생수를 담을 내 마음은 고장나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명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 없이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 각자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바울은 고후 4:8절에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는 능력의 보배인 예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다시 묻습니다. “결박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 외침을 가진 성도가 회복될 때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삽니다. 예레미야처럼 말씀이 우리 안에 불과 같이 타오르게 하여 주옵소서. 흔들리던 마음이 회복되게 하시고, 무뎌진 심령이 다시 깨어나게 하시고, 딱딱해진 마음이 성령의 불로 녹아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불 앞에 다시 서십시오. 복음의 감격을 다시 붙드십시오. 사명의 자리로 다시 뛰어드십시오. 그러면 잃어버렸던 신앙의 야성, 세상이 두려워하는 거룩한 담대함이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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