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4. 삶의 틀을 바꾸는 사람 - 꿈을 꾸다 멈춰 버린 사람들 느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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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6-01-05본문
여러분은 언제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나요? 목회를 하면서 제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두 남자의 흘린 눈물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 분은 우리 교회 성도인데 자신의 평생 일궈온 사업이 망할 때, 정말 가슴을 찢는 것 같은 통곡을 하셨습니다. 또 한 분은 우리나라 전경련 부회장까지 지내셨고 재벌 기업의 총수였던 분입니다. IMF 때 유동 자금이 부족해 평생을 바쳤던 그룹을 매각하며, 그 사나이의 눈에서 그렇게 흘리는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피'를 쏟는 것과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허망함, 그 끝자락에서 터져 나온 처절한 절규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한 사람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느헤미야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는 당시 성공의 정점에 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당시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권력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왕이 마시는 술에 독이 있는지 확인하고 왕과 독대하며 국정을 논하는 자리였기에, 왕의 전폭적인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보직이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라는 거대 제국에서 성공의 정점에 서 있었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조국의 아픔 따위는 외면해도 아무 지장이 없는 안락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입니다. 포로에서 벗어나 돌아간 고국 사람들의 형편이라고요?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되세요? 이민 3세, 아니 타국에서 포로로 끌려가 노예 신분으로 전락한 노예 3세가 겨우 출세의 발판을 마련했어요.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의 출세가 아니라 포로에서 벗어나 돌아간 고국 사람들의 형편에 온 마음이 다 가 있다는 게 이해가 되세요? 우리가 만약 느헤미야였다면 어디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모처럼 잡은 기회입니다. 수산궁에서 더 출세하여 더 많이 갖고 누리며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 아닐까요? 느혜미야는 자기 먹고사는 문제는 아무 걱정 없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았을까요?
Ⅰ. 멈춰버린 꿈은 '거룩한 부담감'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2-3절)
느헤미야의 눈물은 자기 사업이 망해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식이 잘못되어 흘린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하나님의 꿈이 무너진 소식'을 듣고 울었던 것입니다. 2-3절에 보시면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하는지라.” 여기에서‘큰 환난을 당하고’라는 말은 곡식을 타작을 할 때 쓰는 타작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종의 도리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 곡식을 깔아놓고 도리깨로 힘껏 내리치면 곡식알들이 전부 떨어집니다. 환난은 마치 시자들을 땅에 눕혀놓고 도리깨로 내리치듯이 호되게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능욕’이란 단어는 인간으로서는 입에 참아 담을 수 없는 수치를 말합니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그 당시 예루살렘 길에는 날마다 시체가 즐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곽이 없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공격해 오면 대책 없이 당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당시 성벽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돌담이 무너진 게 아닙니다. 그것은 '보호막'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주변 민족들이 언제든 쳐들어와 재산을 뺏고 자녀들을 잡아가는 무법천지였다는 의미입니다. 성문이 불탔다는 것은 그 도시의 자존심과 행정 능력이 완전히 마비되었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고국에 와서 계속된 이 고난 앞에 저들의 마음에 담겨 있는 꿈마져 송두리째 짓밟힌 것입니다. 이제 저들은 더 이상 버틸 힘도 성벽을 재건할 힘도 다 상실한 채 하루 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오늘 제목이 무엇입니까? ‘꿈을 꾸다 멈춰 버린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제일 쓰기 어려워하는 인생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살 의욕이 없어지고,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 사회가 나를 포기하고, 내 형제들도 나를 포기하고, 내가 마포불백이 되었어도, (‘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백수) 나 스스로 아직 나 자신을 포기하지만 않았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나오는 느혜미야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호와께서 위로하신다”라는 말입니다. 이 이름은 느혜미야의 사역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합니다. 그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을 뿐 아니라 무너진 백성의 마음과 정체성을 다시 세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1절에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여기보면 느혜미야는 하가랴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하가랴’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여호와가 자취를 감추었다. 여호와가 어둡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왜 부모가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을까요? 하가랴의 아버지, 즉 느헤미야의 할아버지 때 예루살렘 성이 함락당했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해 느헤미야의 조부와 온 가족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할아버지가 그 아들의 이름을 ‘하가랴’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가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기다리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느헤미야의 할아버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함으로 망하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며 산 것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는 오늘날로 말하면 이민 3세입니다. 이민 2세만 되어도 완전히 이국 사람입니다. 고국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민 3세입니다. 그것도 타국에서 성공한 이민 3세입니다. 포로로 끌려가서 성공이란 자리는 정말 하늘의 별따기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주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성공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느헤미야를 보세요. 비록 자기 백성들이 저렇게 나자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이것을 결코 모른 채 하거나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느혜미야는 조국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하려고 합니까?
Ⅱ. 엎드려 기도합니다. 5절
지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물론 그는 현실적으로 아닥사스다 왕의 행정적인 결재가 없이는 예루살렘성의 중건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결재에 앞서서 하나님의 결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기도응답의 싸인을 받고 싶어한 것입니다. 사람이 허락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움직이셔서 허락하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사람을 움직이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5절에 "하늘의 하나님,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5절에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부르면서 제일 먼저 붙인 수식어가 '크신' 하나님(Great God)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직면한 문제가 아무리 커도 그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보다 문제가 여전히 더 크게 보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까요? 결국 우리는 그 문제아래 눌리고 절망해 버릴 것입니다.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이유가 아니었습니까? 그가 시선을 주님께 두고 있는한 파도가 두려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선을 파도에 두기 시작하자 주님은 작게 보이고 파도만 크게 보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믿음없는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고 크게 보여도 아직 주 하나님이 더 크게만 보인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심을 믿을수 있다면 우리는 주저앉을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의 고단한 역사가 바꾸어지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러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왕을 통해 이 허락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11절의 기도를 읽어보십시오. 지금 그는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을 움직이셔서 그의 신임과 허락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쉽게 이 문제를 왕에게 말하지 않고 기도만 계속했다는 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한 것을 보여 주지 않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느혜미야가 자기의 친족이 전해 준 조국의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기도를 드렸다고 말씀합니까? 4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가 취한 행동이 4개의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울고, 슬퍼하고, 금식하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억만리 멀리 떨어진 고국에서 들러온 소식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습니다. 자신은 페르시아 왕궁에서 높은 지위에 앉아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조국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조국과 그 조국에서 고통당하는 동포들의 소식을 듣고 수일 동안 음식을 먹는 것 마져 잊고 슬피 울었습니다. 왜요? 성벽이 불타고 훼파되었기 때문입니까? 고난 앞에 고통 받는 그것 때문입니까? 물론 그것도 있겠습니다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 백성들의 가슴에 타오르던 꿈을 포기한 모습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 가운데 절대 2026년을 살아가면서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 몇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 예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예배는 하나님 앞에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땅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꿈을 가지게 됩니다. 1년이 52주입니
다. 목숨걸고 예배자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기도의 자리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기도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
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재정 관리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잠시 맡아 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른 물질 관리를 하십시오. 십일조라든지, 감사 건축등 늘
하나님이 나를 사용 하신다는 그 은혜 앞에 이 관리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에게 맡기신 사명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명은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아-멘
느헤미야서의 주제는 ‘다시 세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건(再建)’ 영어로 ‘Rebuilding’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느헤미야서에 단순히 건물만 Rebuilding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도 Rebuilding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과 우리 가정들과 우리 교회가 Rebuilding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오늘부터 ‘7번의 시간을 가지고 새벽마다 느헤미야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새벽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새벽은 하루 중 가장 조용하고, 가장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성경 역사 속에서 새벽에 기도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분명한 복을 주셨습니다. 첫째, 새벽은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붙드는 시간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다윗은 왕이었고 전쟁도 많았지만,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분별하는 복을 누렸습니다. 새벽에 기도하는 사람은 하루를 끌려가지 않고, 하나님께 이끌려 가는 복을 받습니다.
둘째, 새벽은 눈물의 기도가 응답으로 바뀌는 시간입니다. 한나를 기억하십니까? 한나는 자식이 없어 눈물로 기도하던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예배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새벽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새벽기도의 복은 이것입니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확신, 눈물이 사명으로 바뀌는 복입니다.
셋째, 새벽은 하나님의 능력을 새 힘으로 입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도께서도 “아직 어두울 때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사역이 가장 많을 때, 사람들이 몰려올 때, 예수님은 새벽에 기도로 힘을 충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루의 사역을 하늘의 능력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벽기도의 복은 형통만이 아닙니다. 방향을 잃지 않는 복 마음이 무너지지 않는 복 하루를 믿음으로 살아낼 힘을 얻는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피 값을 지불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이룰 것이라는 기대와 비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친 백성으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많을까요? 믿음의 야성,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믿음이란,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넘어진 자리에서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날개를 펴 보셨습니까? 큰일이라고 하면서 왜 기도하지 않으시나요? 아직도 세상의 줄을 붙잡고 계시나요? 분명, 그것은 썩고 말 동아줄입니다. 이제 생명의 줄인 기도의 줄을 붙잡고 지금이야 말로 기도할 때가 아닌가요? 그냥 기도할 때가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할 때가 아닙니까? 모두가 어렵다고 불안해하며 염려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우리나라를 위해, 우리 사회를 위해, 우리의 직장과 사업장을 위해, 우리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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